이 책은 당신의 무기가 될 것이다

[무엇이 옳은가] 후안 엔리케스

by 오후의 책방

https://youtu.be/I8nQt9bR3WI


무엇이 옳은가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


“책은 도끼다.” 박웅현 작가는 책은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구 지성사의 전통적 사유방식을 깨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려한 니체를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합니다. 오늘 진짜 도끼 같고, 진짜 망치 같은 책을 소개하려 합니다.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다. 나의 옳음이 야만이 될지 모른다!

오늘 소개드리는 책은 후안 엔리케스의 『무엇이 옳은가』입니다.

저자 후안 엔리케스는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의 교수’ 중 한 명이고, TED가 가장 사랑하는 미래학자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다른 저서로는 『미래가 당신을 따라 잡을 때』, 『진화하는 사람들』 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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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신념을 바탕으로 타인을 해석하고, 평가하고, 구분 짓는다. 하지만 후안 엔리케스는 “당신이 옳다고 하는 생각이 과연 미래에도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윤리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옮음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고, 내가 지금 무의식 중에 행하는 말과 행동이 미래의 후손들에겐 야만적이었다며 비난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적절한 예가 금방 안 떠오르시나요? 노예제나 인종차별을 생각해보세요.

비록 지금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상식적인 인식에서 인종차별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1967년까지만 해도, 백인과 흑인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불과 한 세기 전, 부모님과 선생님이, 그리고 목사님이 성경을 인용하며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신의 뜻이라며, 유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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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어! 이 책 골치 아픈 책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맞아요. 골치 아픈 책이에요. 그런데 “골치 아퍼!”라는 말은 사실 '난 무엇이 옳은지 잘 모르겠어'라는 뜻이기도 해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을 하기에 생각할 에너지가 난 없어', 혹은 '다투기 싫어'라는 회피의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후안 엔리케스는 “잠깐! 가지말아요. 지금 당신이 윤리에 대해 관심을 갖기를, 친구들과 적들을 상대로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어요. 이 책에는 더 늦기 전에 당신이 관심을 가져야할 주제, 그리고 비록 의견이 부딪히더라도 즐거운 토론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께요.”라고 말합니다.


이 책의 전체를 꿰뚫는 논지가 있어요.

첫째, 윤리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둘째, 윤리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은 기술의 발전이다.

이 말은 기술의 발전이 기존의 윤리관을 바꾸게도 하고,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윤리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지금도 우리는 윤리적 문제가 될 행동과 말을 부지불간에 하고 있다.

넷째, 여러분도 나도 바뀔 수 있다.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님은 이 책을 이렇게 평가하셨어요.

“이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미래의 지적 경쟁력이 될 것이고, 이 책은 복잡한 시대에 당신만의 무기가 될 것이다. 지금 바로 당신의 게으른 윤리 의식을 깨워라. 그리고 이 책이 펼쳐놓은 격렬한 ‘논쟁의 싸움터’로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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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자 정재승 님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친구들과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논쟁하고 싶어 근질근질하게 만든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에서 기후재난 시대의 일회용품 사용까지, 온갖 윤리적 딜레마를 종횡무진 섭렵한다. 당신이 이 사회를 상식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가는 데 당장 필요한 지침서다."라고 추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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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밑줄을 치고 떠오르는 질문과 생각을 메모하고, 때론 분개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아! 이 책은 무조건 읽어야 해. 아니 읽는 것만으로 안 돼. 나가서 사람들과 토론하고 이야길 할거야.” 그리고 ‘내 행동과 말을 바꿀거야’라며 다짐하게 만들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옳고 그름’의 싸움입니다.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 서로 다른 믿음으로 논쟁합니다. 이제는 정치적 올바름의 감수성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이란 말의 표현이나 용어 사용에서, 인종·민족·언어·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뜻입니다. 어떤 언어, 어휘를 사용하느냐가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성차별적인 어휘가 통용되는 사회는 부지불식간에 성차별적 사고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서양식도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2021년 미국에서는 성별란에 처음으로 성별란에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X로 표기된 여권을 발급했습니다. 캐나다, 독일, 인도, 네팔, 파키스탄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미 다른 표기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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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에도 성별표기가 다양해졌죠(페이스북 71가지 옵션).

네, 다양해졌습니다! 이 다양성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보죠.

자연의 법칙은 단순하지만 현상으로 드러날 때는 예측할 수 없이 복잡합니다. 자연은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색깔이 있듯, 생물의 개체도 다양성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지구의 가장 큰 위협은 생물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2장 <기술이 윤리를 바꾸는 것이 옳은가>에서는

말라리아나 지카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해 특정 모기를 멸종시키는 연구가 진행 중인데, 과연 이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를 묻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이 생물의 다양성을 없앴다고 지적했어요. 되돌아보면 인류는 지구상에 발을 딛지 않은 곳이 없고, 인간이 들어갈 때에는 자연적이지 않은 인위적인 과정에 의해 많은 생물종이 멸종됐습니다. 그로 인한 생태계 균형이 무너진 사례들도 있었구요. 결국 자연의 다양성을 파괴한 것은 인간의 문명의 문명이었습니다.


원서는 2020년에 출간됐는데, 좀 더 빨리 한국에 번역되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물론 이 책이 일찍 출간되었다 한들 모두가 이 책을 읽진 않았을 테고, 진실이 중요하지 않은 포스트 트루스Post-Truth시대에 ‘아니면 말고’식의 거짓뉴스, 프로파간다가 난무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이 책 한권이 한국 사회를 바꿀 순 없을 겁니다. 미국은 트럼프가 재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래도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정치관은 사람마다 다르니, 단정지을 순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2년의 차이가 무척 아쉽습니다.

이 사이에 한국에 중요한 사건은 대선이었습니다. 선거는 각계각층 집단의 주장과 그 반대 주장이 심각하게 대결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남녀혐오, 장애인차별, 탈핵과 에너지정책,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은 참 풀리지 않는 난제입니다.


후안 엔리케스는 2장에서 이제는 생산량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2017년 전 세계에서 50명도 안 되는 사람이 세계인구 절반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헬조선이란 말은 이런 분배와 기회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저자가 다루지 못한 ‘한국만이 갖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북한의 핵, 중국일본의 역사문화 침탈 그리고 일제 강점기 친일 기득권과 식민사관과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켜켜이 쌓인 이념논쟁 등 정치사회적 갈등입니다.

이토록 갈등이 많은 대한민국이기에 이 책이 좀 더 빨리 출간되었더라면 비록 미비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세계는 다시 전쟁의 시대로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저자가 책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비정상적 사고를 가진 지도자와 핵무기의 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요. 결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어제 기사에 보니, 우크라이나 원전 위로 미사일이 오갔다고 합니다. 원전이 폭발하는 것은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없죠. 그리고 동북아에도 전쟁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은 확정된 미래 시나리오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면서도 굉장히 현실감이 없어요. 가끔 대한민국은 멘탈이 강한 게 아니라, 정말 반쯤 잠든 상태, 멍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섬뜩할 때가 있어요.


이 외에도 후안 엔리케스는 계급과 빈부, 인종차별과 성다양성, 환경과 에너지 문제등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윤리’의 잣대를 가져다 놓습니다.

1장 <인간을 다시 설계하는 것이 옳은가>에서는

인공수정과 유전자 조합 기술에 따른 윤리 문제, 성적 지향성을 의학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과연 동성애에 적용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기술발전이 인간을 유전적으로 성적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을 때에 과연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해자고 합니다. 일단 1부부터 충격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혹시 머리가 너무 복잡해지면 영화 <더 타이탄>을 보며 잠시 휴식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영화는 극심한 환경오염과 기아로 척박해진 미래의 지구, 인류의 생존을 위해 신체의 변형을 시도한다는 영화인데요. 저자가 말하는 인위적인 유전자 조작과 신체 변형, 그에 따른 윤리문제를 상상해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2장은 앞에서 말씀드렸고요. 3장 <어제의 세계는 지금도 옳은가>에서는

“윤리는 변한다”는 이 책의 대전제를 설명하는 장이에요. 노예제, 인종차별,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과 제도가 변화해 왔습니다. 그런 변화를 밀고 당겨준 것은 미디어 기술의 발전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는 동감해요. 성소수자들에 대한 저의 인식도 그들의 겪는 고통과 차별을 다룬 영화와 다큐를 보며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3장 안에 <신의 얼굴은 계속 바뀐다>는 챕터는 종교 원론주의에 대해 지적하고 있어요. 저자는 축의 시대의 저자, 캐런 암스트롱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든 종교와 윤리, 영적 전통의 중심에는 연민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는 그 방식 그대로 항상 다른 이를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는 종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부분은 뒤에서 부연설명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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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SNS 속 무제한 자유는 옳은가>에서는 지울 수 없이 흔적을 남기는 디지털 문신과 인공지능 개발자들의 편견을 지적합니다. 넷플릭스 다큐 <알고리즘의 편견>에서 조명한 적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안면인식 소프트웨어가 흑인, 소수인종의 인식률이 백인남성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죠. 이것은 개발자들의 편견이 반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5장 <지금의 사회구조 시스템은 옳은가>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관한 여러 주제를 다룹니다. 신약개발, 의료보험제도, 분배나 교육 등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가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지 묻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을 독점하고 있다가 그들이 그것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때 훨씬 더 높은 가격에 파는 행위는 매우 비양심적이고 비윤리적이다.” 마스크 대란이었을 때 우린 이 경험을 한 적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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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당신의 ‘옳음’은 모두 틀렸다>는 읽으면서 메모에 육두문자를 많이 적었어요. 분개심이 끓어오르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난민과 전쟁, 무능하거나 광기를 가진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떠오르는 몇몇 국가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선택과 결정을 미룸으로서 결과적으로 죽음을 방관하는 사례를 다루는데요. 화이자의 사례를 다룬 문샷에서처럼 코로나19 백신개발은 좋은 사례에 들어가지 않나 싶습니다. 문제는 백신개발과 별개로 변이는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에요. COVID19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네요.


그리고 마지막 7장, <그래서.. 결론은?>에서는

비록, 원론주의자들의 맹목적인 믿음, 정치의 편향, 기술이 가져올 새로운 윤리문제를 우려하면서도 ‘윤리가 변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변하고 있어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들과 어떻게 토론을 멈추지 않고 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7장에서 저자의 제안에 100% 공감하지만, 사실 약간 김빠지는 기분이었어요.

겸손과 존중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저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엔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은 안 바뀐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아. 결국 우린 수많은 경고와 기회를 놓쳐버리고 결국 인류의 대부분은 죽게 될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할 순 없을 테니까요. 판단도 선택도 행동도 사람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니,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나, 라고 이해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사고의 틀, 인생관이 바뀌려면 여간한 인격을 갖추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때론 삶과 죽음이 오가는 경계에 가서야 크게 깨닫기도 하고, 자신이 믿고 인생을 바쳐왔던 가치가 완전히 무너진 후에야 새롭게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코로나19 펜데믹, 전쟁, 기후변화와 대자연의 재난을 인류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자연이 혹은 신께서 ‘나의 아들딸들아 바뀌어야 한다. 제발 바뀌어야 한다. 비록 현실은 고난이지만 미래의 너희들에게 주는 나의 기회란다.’라고 하고 계시진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이 책이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고 한 이유는 깊이 곱씹어보아야 할 말씀이에요. 정치 지망생과 사회의 리더가 되고자 하는 분들이야 이 책은 반드시 필독해야 할 必必必필독서이고요. 우리 평범한 모든 사람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유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함으로써 내 인생의 색깔과 모양을 만들어가기 때문이에요. 나의 옳고 그름의 선택의 결과가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정신적, 물질적인 유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말 하나,

여기까지 책에 대한 소개였고요. 조금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훌륭한 양서에 괜한 사족이 될지도 모르지만, 후안 엔리스케는 이 책이 판을 거듭하면서 더욱 나아질 수 있도록 독자의 의견을 기다린다고 하셨어요.

그는 이 책이 미국-서구 윤리에 편향되어 있다고 고백했어요. 동양과 서양의 윤리적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토론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으니, 동양인 서평가로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하나 후안 앤리캐스를 비롯해서 동양철학이 중국철학인 줄로 착각하는 서구 지식인들에겐 사실관계를 바로 잡아줘야 할 필요도 있고요.


자! 공자와 노자 그리고 수많은 제자백가가 공통적으로 인문의 시조로 모시는 분은 바로 태호복희씨입니다. 태호복희씨는 우리 한국인의 조상입니다. 동양철학 사상의 시작은 태호 복희께서 자연의 법칙을 도상화한 하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역철학이라고 합니다. 하도와 낙서를 보관하는 장소를 도서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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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변역變易, 즉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하늘도 땅도 인간도 심지어 신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두번째는 불역不易, 모든 것이 변하지만 변화의 법칙, 원리, 본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간易簡, 아무리 변화가 복잡하더라도 우주변화의 원리를 알고 보면 간단하다는 뜻입니다.

음과 양, 분열과 통일, 확장과 수축, 봄여름가을겨울, 생노병사 우주의 모든 변화를 밝히는 것이 음양오행의 순환법칙입니다. 요즘 복잡계 이론이 주목받으면서 음양오행을 동양의 복잡계이론, 동양의 프랙탈이라고도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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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밝힌 주역은 “시중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맞는 행동, 정말 쉬운 비유를 들자면, 군자란 모름지기 걸음걸이는 엄숙하고 단정해야 한다지만, 만약 임금이 부를 때도 차분히 걸을까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에도 차분히 걸을까요? 아니겠죠. 모든 판단과 행동은 시의 적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자는 인간의 심성,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근원을 우주의 이치인 원형이정元亨利貞에 배치했습니다. 즉 하늘의 이치가 인간의 심성으로 자리 잡은 것이 인의예지라는 것이죠. 인의예지가 곧 천심이며 도심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정말 제각기잖아요. 타고난 기질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이런 거친 성정을 인심이라 합니다. 인심을 다스리고 도심을 따르는 것이 곧 생활윤리입니다. 동양의 윤리는 내 마음을 그 근원인 천리와 하나되는 것, 즉 수양론修養論이 강조됩니다.


희랍어 퓌시스physis는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뜻입니다. 동양의 자연의 의미와 상통하지요. 동서양 모두 자연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인간은 자연의 이법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철학의 주제는 자연의 근원과 원리를 밝히려는 자연철학에서 인간의 이성과 인식문제로 바뀝니다. 서양철학은 결국 우주의 변화법칙을 규명하지 못함으로써 이성의 사변적 논쟁이 끊임없게 되었습니다.


철학이 신학의 시녀가 된 중세에는 윤리의 근거는 신, 사실 신이 아니라 성직자들에 의해 해석된 성경이었고, 종교혁명을 거치며 근대에 이르면 진화론과 과학에 의해 기독교의 권위는 도전을 받습니다.

저자는 이 책의 3장의 <신의 얼굴은 계속 바뀐다> 챕터에서 구약성서에 폭력을 묘사하는 구절이 1천여 개나 되며, 신이 직접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부분이 100개 이상이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교황은 이런 신을 따랐고, 이단자들은 고문과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엔리케스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다르다는 점을 간과했어요. 구약에서 폭력을 명령하는 신과 신약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른 신이 전혀 다른 신입니다.

구약의 등장하는 여러 신 중에, 야훼는 서아시아 유목민을 지키는 지역신입니다. 모세의 신이며 유대인의 민족신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보편적 하느님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이민족과 타 종교를 없애버리고 명령하는 야훼를 내세웁니다. 때론 제국주의의 힘을 업고 전쟁의 신으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의 신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전쟁의 신이라면? 어떻게 보편적 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가 세계의 보편 종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하느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저자는 종교가 시대에 흐름에 맞춰 적응하지 못했을 때에 소멸하고 만다고 하며, 성서도 꾸준히 재해석되고 진화해 왔다고 말합니다. 만약 저자가 무신론자가 아니라면, 이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인간이 신을 알아가는 만큼 종교가 변해가지만, 반대로 인류의 문화가 변해가는 데에 따라서 신도 자신을 바꿔간다는 간다는 논리가 되죠. 후안 엔리케스가 이 부분을 쓸 때 이런 점도 생각했을까요? 결과적으로 아주 멋진 해석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저자는 종교가 근본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바뀔 수 없는 종교의 한계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신을 믿고, 지역과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종교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본 하늘과 제가 본 하늘이 다 같은 하늘이지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다르다고 굳이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끝없이 무한한 하늘의 어느 한 조각을 보았을 뿐이겠지요.


덧붙이는 말 둘,

후안 엔리케스는 유발 하라리와 마찬가지로 오래 전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형제 인류 간에 인종청소, 집단 살해가 있었다고 보는 데요.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순진한 생각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황금시대였다고 상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과 살육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지엽적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호모사피엔스는 다른 여러 호미닌의 유전적 후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른 형제 인류를 만났다고 해도 전쟁보다는 우호적 관계가 더 많았을 거라 생각해요. 이에 대한 근거와 사례는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 카인드』을 참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동아프리카 단층지역에서 최초의 인류가 탄생했다는 것도 성급하고 유치한 논리라고 생각해요. 건조한 기후와 단층으로 인해 유골이 잘 보관되고 발견되기 쉬운 곳이지, 이 지구에 단 한곳에서 인류가 탄생했다? 지나친 단순논리다고 생각해요. 제한된 샘플로 유전학적인 기원을 밝히려고 하는 것 같아요. 새로운 화석과 유골이 발견되면 언제든 결과가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인류의 출연을 포함해서 새로운 종의 출연과 멸종은 더 큰 이벤트, 우주의 주기적 변화가 큰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자들은 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하는 거대한 우주의 순환 주기를 밝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적 생태계 변화와 팬데믹, 기후변화 문제를 우주의 순환주기라는 큰 틀 안에서 해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멸망이나, 종말이 아니라, 우주론을 토대로 인간 의식의 혁신과 문명사적 전환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가 잘 모르지만, 한 가지 이유는 오래토록 서구인의 의식에는 직선적 우주론이 무의식중에 고착화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는 서구의 학문체계나 방법론이 지나치게 세부적인 분야로 나눠져 있다 보니, 컨버전스Convergence 학제 간 연구가 어려워지고 우주와 인간을 종합적으로 보는 안목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저자는 책에서 내내 이 말을 강조합니다.

지금 당연하게 하는 행동과 말이 훗날 후손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오늘날 윤리적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절대주의를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의 후손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지구가 더 이상 후손들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면, 만약 내가 살아 있는 당대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후손들의 비판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며 줄곧 마음 속 깊이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희망대로 후손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면 참 기쁜 일일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너희들에게 지구를 전해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후의 책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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