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내 아들, 오늘 고생 많았어, 아들.
나는 너의 선생님도 아니고, 학교나 직장에 선배도 아니다. 집 밖을 나서면 네가 하는 데로, 네가 가는 데로 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잖니. 그러니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이 토시하나조차 쓸데없는 말 같을 때가 있단다. 어릴 땐, 네가 다리 아프다면 잠들 때까지 주물러주고, 네가 배고프다면 슬리퍼 달랑 하나 신고 점빵에 간식 사러 나서겠지만. 이젠 네가 아프다 하면 다리가 아픈 것인지 마음이 아픈 것인지, 배고프다면 정말 배가 고픈 것인지 너의 허기가 혹 막연한 미래와 불안한 지금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빤 이제 네 삶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헤아리지 못하겠구나.
사랑한다. 내 아들. 오늘도 고생 많았어. 잘하려고 애쓰느라 힘들었겠구나.
모처럼 만났는데, 짜증 내고 언성 높일 때엔 아빠도 기분이 안 좋지. 네가 그럴 때 아빠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이성은 인내하고 기다리고 너의 말을 좀 더 들어보라고 하지만 감정은 끓어오른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으로 식어가더구나. 삶은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사랑하지만 화가 나고, 사랑하지만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 좀처럼 다루기 힘든 감정이 사랑이란다. 너도 그 누군가에게 그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아빠는 너와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란다. 그건 운명이야. 네가 자랄수록 너의 이야기는 더 커져가고, 아빠의 이야기는 줄어드는 게 맞아. 가끔 그걸 잊어버리는 건 아빠 잘못이야. 아빠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싫었어. 할아버지는 세상은 이기적이고 냉정하고 온갖 불의함으로 가득 찬 것임을 반복하고 반복해서 이야기하셨거든. 내가 세상엔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 더 많다고 하면 '넌 인생을 아직도 모른다, 네가 어떻게 살지 걱정이 태산이다'라고 언성을 높이셨지. 난 당신께서 살아온 세상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르다고 대들었어. 그런데 결국 나도 할아버지와 같은 말을 하게 되는구나. 겉말은 다를지 몰라도, 속말은 같아. 할아버지의 말에는 이 말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난 내 아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처받고 속을 때라도 금방 털어내고 네 갈길을 갔으면 좋겠다. 세상 각자가 저마다 다 소중한 사람들이겠지만, 나한테는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소중하다.'
사랑한다. 내 아들. 오늘도 고생 많았어. 푹 쉬고 잊어버려. 너를 아프게 한 것들, 그 따위 것들. 푹 쉬고 잊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