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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Mar 11. 2024

고요에 머물 때 존재가 자신을 드러낸다

https://youtu.be/AGZOJWX0hXI?feature=shared

《수도원에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김선호 작가 인터뷰2


오후 : 제가 선생님의 다른 책을 한 권 밖에 읽지는 못했지만, 그동안의 책은 감정의 파도 사이를 잘 항해하는 지혜를 많이 담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 책은 파도가 아니라 바다의 깊은 심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암자에서 생활을 하실 때 철사의 묶인 소나무와 가재를 건져 내신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이 얘기를 직접 시청자분들께 한번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선호 : 사실... 인터뷰 사전 질문지를 봤을 때, 그 내용에 들어가서 사실 저는 놀랬어요. 왜냐면 이 책을 아시고, 읽으신 분들한테 피드백을 책에 어떤 내용이 너무 좋았어,라는 얘기를 했을 때 가재 얘기를 꺼내신 분은 한 분도 없었거든요.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노숙자가 됐던 이야기라든가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어떻게 보면 이건 가재랑 소나무는 사람이 아닌 대상이잖아요. 어, 이 대상을 뽑아서 질문 주신 것도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진리나 구도에 대한 생각을 하셨던 분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맞아요) 일반분들은 그것보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닿거든요.


  프란치스코 수도회 안에서는 어느 일정은 교육기(수련기)가 끝나면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고 서약을 해요. 성대서약 또는 종신서약이라고 하는데, 그걸 하기 전에 혼자 있는 ‘사막의 시간’을 거의 한 달 정도 가지게 해요. 대불리라는 마을이 있어요. 남쪽에 있는데, 지리산 자락에. 암자를 지은 분은 불교 신자는 아니시고, 도를 닦으시는 분인 것 같아요. 그분이 산 중턱에 만든 암자에 소개, 소개를 받아서 갔어요. 거기서 한 달까지는 아니고 한 20여 일 가까운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 혼자 머무르면서 이제 저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진 거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냥 산에 진짜 암자만 있고, 대화할 상대가... (앞에서 언급한) 소나무 그리고 가재뿐이었는데, 거기 일상은 아주 단출해요. 끼니도 하루에 한 끼 정도 먹고 물은 암자 옆에 졸졸 흐르는 약수 흐르는 걸 드럼통 같은데 받아놓는 곳이 있고 점심때는, 제가 그때 배즙을 가지고 갔었는데 배즙 하나랑 미숫가루 정도만 먹고, '좌관坐觀'이라고 앉아서 하는 거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했어요.

 몸을 풀기 위해서 산책을 하다가, 소나무 숲이 암자 옆에 이렇게 쫙 있어요. 아마 먼저 계셨던 그분이 심어 놓으셨던 소나무 같은데, 심어놓은 게 약간 정갈한 느낌, 길도 이렇게 있고 그 길이 참 좋았어요. 거기를 자주 산책을 했는데, 어느... 처음엔 몰랐다가 일주일 지났나? 한 일주일쯤에 한 소나무가 유달리 눈에 보이는 거예요. 왜 그렇지? 하면서 이렇게 줄기를 따라 보았는데, 중간 정도에 제 키를 훌쩍 넘은 위치에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어요, 거기만 '어? 왜 볼록 튀어나왔지?' 하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봤는데 굵은 철사줄이 소나무에 감겨 있었던 거죠. 보통 누가 와서 잠깐 캠핑을 하다 갔거나, 아니면 산불예방 그런 걸 붙여 놓았다가 떼갔거나 그랬겠죠? 철사줄만 끊어가고, 소나무에 감겨있던 철사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거예요. 세월이 흐르니까, 이 두꺼운 철사에 소나무가 몸통이 자라면서 몸이 끼인 거죠. 그 부분에 송진이 막 나오고 두툼해진 상황이었더라고요. 

그래서 나무가 너무 아플 거라는 생각도 했고, 나무 스스로는 그걸 도저히 깰 수가 없잖아요? 해서 내가 저걸 잘라줘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이제 도구가 없어서 간신히 낫을 하나 찾아가지고, 그 암자에서! 그 낫을 들고 기어 올라가서 어렵게 어렵게 끊어냈던 기억이 있어요. 처음에는 이제 해방감을 준다,라는 느낌. 소나무한테... 그것만 생각을 했어요. 소나무를 자유롭게, 계속 아프지 않게 해 줬으니 너무 기쁘잖아요. 좋다,라고 막 있다가 문득 그 생각이 들었던 거죠. 진리를 깨닫는다고존재라는 걸 내가 아무리 알아차리려고 애를 써도 한계가 있을 수 있겠구나철사라는 한계를!’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깰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누군가가 터치를 해 줘야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구나, 하는 부분을 이제 거기에서 곁들여서 알게 된 거죠. 그건 '성찰'이라고도 할 수 있고 뭐... 누군가가 터치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탓할 필요도 없고, 뭐 그 상태로 죽을 수도 있어요. 불교용으로는 계속 몇 번을 윤회한다고 하는 데가 가톨릭에서는 부활이란 표현을 하고. 그래서 내 딴에는 노력을 하나, 주어지지 않는다 한들 '받아들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할 수도 있겠구나!' 또는 운이 좋아서, 지복이 있어서 건드려짐을 당하면 나도 또한 그런 걸 맛볼 수 있겠구나, 그런 걸 느꼈던 거죠.   

  

 가재는,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이게 가재라고 생각하면 개울가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가재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제가 그 가재를 만난 건 가자마자 첫날이었어요. 우리 김장할 때 쓰는 큰 드럼통 같은 걸 약수, 쫄쫄쫄 나오는 걸 어디서 관을 박아 가지고 이렇게 산에서 내려오게 하셨더라고요. 그 호스가 되게 작았어요. 엄청 가느다란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통 안에 이렇게 떨어지게 해 놨단 말이에요. 그 통이 넘쳐서 옆으로 물이 한쪽으로 해서 새어 나가고 항상 새 물이 받아져 있는 거죠. 그 물을 이제 암자에서 사용하는데, 물맛은 정말 좋아요. 

 물을 뜨는데! 바닥에 이렇게 나뭇잎이 한 장 가라앉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건 집어내야 되겠다, 좀 깊었는데 이렇게 하는데, 이게 움직이는 거예요. '어? 가재가 어떻게 여길 돌아왔지?' 근데 바로 풀어주지 않고 너 나랑 친구 하자.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여기 오래 있어야 되거든, 나랑 친구 하자고 그냥 냅 뒀어요. 냅 두다가... 

 어느 날 문득! 저 가재가 어떻게 돌아왔을까? 통은 닫혀 있고, 가재가 제법 컸거든요. 성체가 된 가재였고. 그 안에 관은 정말 작아서 한 5mm 되려나, 지름이? 지금 성체로 된 몸으로 들어올 수 없고 문득 드는 생각에 제가 어릴 때 산에서 가져다 생각이 나요. 엄청 작았던 새끼들도 많이 봐왔었거든요. 얘가 얼떨결에 관을 타고 새끼 때 들어왔다가 여기서 어른이 되도록 있었구나! 얘에겐 이 세상이란 '통 세상'인 거죠. 바로 풀어줘야 했으나, 친구가 필요해서 거기서 제가 암자 생활하는 동안 있다가 내려오는 마지막 날, 걔를 데리고 나왔어요. 신기한 게 손으로 이렇게 댔는데 이렇게 쑥 올라왔어요. 올라와서... 제가 사용하는 밥그릇 같은데 담아 가지고 산 중턱 아랫부분에 냇가에 왔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때가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엄동설한이라, 냇가가 얼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큰 돌을 가지고 던졌어요. 얼음이 '펑'하고 깨지는데 느낌이... 뭔가 세상이 열리는 듯한 그리고 그 안에 가재를 넣어줬죠. 이거는 그동안 좁은 세상 속에 살았는데... 근데 가재한테는 미안해요. 왜냐하면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오후 : 손을 내밀었는데, 본인이 올라탔으니까... 

김선호 : 아! 그런가요? 다행이다. 아마 엄청 두려웠을 것 같아요. 통 안에 있으면 천적도 없고 평생 그 안에서 그냥 안전하게 살다 갔겠죠. 근데 그 세상에 내려보내 줄 때 그 친구는 정말 새로운 새 물을 만나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잖아요 얼마나 그 안에서 오래 살아남았을지는 잘 모르나 그래도 보내주고 싶었어요 이게 진짜 세상으로! 바로 돌 아래로 숨어 들어가더라고요. 그때도 비슷한 거죠. 가재의 힘만으로는 드럼통을 나올 수가 없어요그 가재는 그 안에서또 다른 세상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그 세상이나 진짜가 있는 것들을 보고 싶다고 아무리 기도를 하든 외치든 보지는 못했을 거예요. 누군가가 만났고 터치를 한번 해서 어딘가로 옮겨 주는 그런 과정이 또 소나무 하고도 비슷하죠. 소나무 측면을 조금 다른 측면을 보면 그건 심리적인 상처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소나무는 세상 속에 나와 있으나 묶여 있는 상태고, 가재는 나와 있지는 않았죠. 아직 아무것도 맛본 상태는 아니에요. 둘 다... 절대적인 무언가에 터치가 있지 않은 이상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겠다고 그냥 비유적으로 그렇게 판단해서 느꼈던 것 같아요. 그걸 이제 그 내용에 적었고, 그걸 질문해 주셨네요.      

오후 : 많이 느꼈어요. 그대로 공감이 됐고 제가 '줄탁동시'라는 아이디를 항상 쓰거든요. 

김선호 : 아! 교육용어에서도 그 말을 많이 써요.

오후 :  '진리를 찾는다, 구도를 한다.' 표현이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고요히 머무는 과정에서 나의 과거와 마주해서 용서하고, 또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내 몸에 마음에 스며든 습성을 정화, 치유하는 시간이 꼭 오는 것 같아요. 이 책에서는 <꿈의 해석>이란 장에서 그 부분을 심리학으로 참 잘 풀어 주셨는데, 수도원 생활 중에 공부를 하시면서 심리학과 철학에서도 큰 도움을 얻으신 것 같아요. 어떤 점이 있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선호 :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공식 명칭은 <작은 형제회>인데요. 교육을 담당해 주셨던, 장상(superior) 형제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수도원 원장님이 되겠죠. 그분들께 감사를 드리는 것 중에 하나가 영성이나 신앙, 그런 쪽으로만 하신 게 아니라 심리학으로 도움을 받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서강대학교 심리학 교수님이 수도원으로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개인 심리상담도 해주고 또 그룹이 있어요, 기수가 있거든요. 다섯 명 동기랑 같이 정기적으로 집단 상담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심리학이라는 게 세상에서 알려지지 않았어요. 뭐 혈액형으로 심리한다는 대학이 유명.. 그런 시기 정도? 이런 걸 해서 뭐 하나 그랬는데 그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아! 이게 나를 찾아가는 여정 중에 특히 저는 그룹, 같은 동기 형제들 간의 집단 상담을 하면서 제 중고등학교 시기를 바라보는 시기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것도 성장 과정이 있었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깊은 단계는 아니었고요. 오히려 심리학에 대한 건 교직 하면서 공부하면서 더 많이 되돌아볼 수 있었어요. '아, 그때 그런 것이었구나!'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었고요. 첫발을 지니게 된 계기는 수도원이었죠. 나를 어떻게 돌아보는가에 대한 건 그렇게 처음 맛보고 배웠던 기회가 있었고, 철학은 신학교 가톨릭 대학교에서 전통적으로 배우죠. 순서대로 고대 철학부터 해서 중세 철학, 근현대 철학하고 나서 인식론으로 넘어가고, 마지막 단계에 형이상학을 하고 그러고 나서 신학으로 배우는 과정이 아주 체계적이거든요. 그때 이제 철학에 대한 시선... 우리는 철학하면, 개똥철학이라고 해서 술 한잔 마시면 나오는 게 철학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상당히 날카로운 부분들이 많거든요. 저는 인식론 배우고, 형이상학을 배울 때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 두 부분이, 심리학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지금은 그나마 좀 인문학에 대해서 많이 관심을 가진 세대라서 다행이라 생각하는데 삶에 대해서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 내부의 상황을 객관적으로도 바라보고 주관적으로도 바라보고 삶의 기준을 나가는 데 있어서, 두 학문이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후 : 그게 살아가면서 뿐만 아니고, 진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거죠? 

김선호 : 네 삶 자체가 어느 방향으로 항상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기준점이 필요하잖아요. 물론 그 기준점이 무너질 수도 있겠지만 그걸 주관적인 감상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어느 땐 철학의 도구를 차용하고, 어느  때는 또 심리학의 도구를 사용하고 그런 면에서는 저는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후 : 책에서 ‘신앙은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바라보지 못하던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순간 더욱 성숙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 부분이 저는 신앙을 하는 데 있어서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아까 도구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뭔가를 볼 수 있는 도구를 더 넓혀 주는 게 심리학과 철학이라는 다른 부분이 아니었나.

김선호 : 네, 그래서 철학도 이제 가톨릭 대학교 안에서는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많이 하고,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프란치시칸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둘이 좀 달라요. 하지만 다른 도구를 사용해도 다가가는 목적성은 같기 때문에! 각자 각자가 내가 사용하고 싶은 도구들이 다르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철학이 아주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저는 철학이 사람하고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그나마도 심리학이 아닌지 심리학을 하는 분들도 철학을 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걸 보다 마음의 용어로, 결국엔 용어의 차이일 뿐 마음의 용어로 바꿔서 하는 부분이 있어서는 심리학이 조금 더 지금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용어로 많이 풀어주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요.   

오후 : 이건 과학도 같이 포함되는 거죠? (그렇죠) 다음 질문은 되게 궁금한 질문인데 '말로 할 수 있으면 그건 도가 아니라'는 말도 있잖아요. '도가도 비상도'란 말이 있는데, '칠판에 숨어있는 존재가 가슴을 찌른 순간'을 이 부분을 제가 설명해 달라는 게 어려운 부분인 건 아는데 그래도 언어를 빌려서 말을 빌려서 이때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선호 : 배경을 설명해 드리자면, 형이상학 시간이었어요. 철학에서는 거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죠. 철학을 배우는 시기에서는... 제일 중요한 키워드는 '존재'라는 키워드가 있고 '존재자'라는 키워드가 있어요. 그 두 가지 단어로 형이상학이 시작되고 귀결을 짓는데, 교수 신부님들 강의가... 좀 졸려요! 외국에서 유학, 독일에서, 이태리에서 유학하고 오시는데 거의 다 책을 한 강의 시간에, 책 한 권씩 거의 읽어주시면 강의가 끝나는 시간이에요. 

이해는 하겠어요. 무슨 말인지는 이해는 하겠는데, 느껴지지가 않는 거예요. 형이상학을 배웠다고는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칠판에 '존재'를 잔뜩 적어 놓으시고 '존재자'처럼 관련된 거 잔뜩 적어 놓으시는데 와닿지가 않으니까. 답안지를 잘 쓸 자신은 있었어요. 실제로도 점수는 A+을 맞고 시험지는 잘 쓸 자신이 있었는데 내 것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만 일단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존재가 아무튼 나한테 와닿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그게 간절했어요. 교수 신부님이 물론 재미없게 강의를 하시지만 그것이 이유가 아니라 내가 이 시간에 저 '존재'라는 걸 만나지 못하면 평생을 모르고 지나가겠구나,라는 절박함 같은 게 있었어요. 그냥 나는 이게 내 한계겠구나,라는 생각에서 계속 바라봤어요, 계속. 도대체 저기서 말하는 게 뭐지? 저걸 어떻게? 계속 바라봤는데 결국에는 수업 끝날 때까지 모르겠더라고요. 또 기가 죽었어요. 너무 슬펐어요. 내가 그런 걸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존재'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게 너무 슬프고 절망에 가까웠어요. 그 순간에!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대학교 과대가 있잖아요. 신학교 과대가 있었어요. 철없이 앞에 나가 가지고, 다음 수업 시간 준비한다고 칠판은 막 지우는 거예요.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저걸 다 지워버리고 있으니...’ 하고서, 고개 숙이고 있다가, 칠판지우개를 털로 나가더라고요 그때 다시 딱 봤는데, 비어있는 칠판이 보였어요. 이건 책에 쓰여 있는 내용 그대로예요. 비어있는 칠판을 보는 순간 그 비어있는 칠판에는 존재가 그냥 저한테 들어왔어요. 저렇게 밖에 표현을 못해요. 그리고 그 순간에는 눈물이 뿜어져 나왔어요. 그리고 이걸 감춰야 되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사실 화장실로 달려가면서 이미 바로 사라졌어요. 의식하면 바로 사라져요. 그래서 너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냥 들어왔다 갔다! 바람이 불었는데, 바람이 내 안에 들어왔다 존재의 바람이 들어왔는데, 들어왔다 나갔다!  그렇게로만 설명드리면 될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그걸 그렇게 맛보고, 혹시라도 책을 읽고 그런 걸 맛보고 싶은 거에 너무 싸여 있지 않기를 그러면 붕 뜬 철학이라든가 신비주의 같은 데로 넘어갈 수 있거든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진짜 현실 그냥 현실이었고. 지성으로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고 여겨져요. 그래서 제가 그때 간절함이라고 얘기했잖아요. 이 간절함이 하나의 안테나 역할을 하는 거 같아요. 라디오 주파수처럼 이렇게 채널을 막 돌리다가 주파수가 딱 맞는 것처럼 그래서 그러한 것들에 대한 열망이나 간절함 정도를 지니고 있는 채로 기다리고 있다가 주파수가 맞춰지는 때가 있으면 잠깐 느껴지면 돼요 계속 그걸 이렇게 만지려고 하면, 바로 사라지고 해서 간절함 정도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다 그 순간이 라디오 채널이 맞춰지듯이 오는 날이 있지 않을까!      


오후 : 이제 책을 쭉 읽다 보니까, 어떤 예술가들은, 어떤 과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경이로움에서 순간 다가올 때도 있고...

김선호 : 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봤을 때 느끼셨다는 분도 있고, 

오후 : 맞아요. 어떤 분은 예술작품을 통해서 그런 걸 느낄 때도 있고.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의자 있잖아요. (아! 사진작가의 벤치요.) 네, 전 그런 감정만 느끼고 있겠습니다(설명하려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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