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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장인J씨 Feb 23. 2024

이별 후 X 년이 지났다.

나만 몰랐던 사회적 합의.




대한민국에서 남자든 여자든 사람으로 살고 있으면 꼭 한 번은 듣는 질문이 있다.


"여자친구는 있어요?"

"남자친구는 있어요?"


여기서 없다고 하면 이런 말을 듣게 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결혼…!"


잔소리 단골 소재인 결혼. 명절 때마다 잔소리하지 말라고 뉴스에 나오는데도 결혼하라고 붙잡고 늘어지는 어른들이 있다. 하지만 개 같이 싸우다가 이혼하는 사촌들이 늘어나면서 '결혼 뭐 하러 하냐!'라고 호통치는 어른들도 생겼다. 요즘 애들은 다르다, 아이도 안 가지는 딩크족도 있다더라.

그렇게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갑자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말한다.



"결혼은 안 해도 연애는 해야지."



연애 (戀愛)

명사: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

유의어 - 로맨스, 사랑, 애련

- 네이버 어학사전.


집안 어른들, 직장 상사들, 오래된 친구들. 심지어 안 지 얼마 안 된 모임 사람들까지.


"지금이 제일 예쁠 때인데 연애해!"


난 대한민국 33살 여자 사람이다.

나는 오늘도 연애하려고 노력 중이다.








소개팅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 뭐 하세요? ㅎㅎ 저는 퇴근했어요!

- 늦게 끝나셨네요! 저는 운동 가려고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바로 핸드폰이 울린다. 난 핸드폰을 그대로 두고 운동복을 챙겼다. 집에서 막 나가려는데 주머니 속에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혹시나 해서 꺼내보니 소개팅남 P다.


'운동 간다고 했으니…. 몇 시간은 무시해도 괜찮겠지.'


보통 소개를 받으면 요일, 시간, 장소만 정하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이게 사회적 합의란다. 만나기로 한 날짜에서 하루 전 날에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하는 연락과 함께 무엇을 먹을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정도의 대화만 오고 갔다. 너무 정 없지만 실리적인 사회적 합의이다. 


실리-적 : 실제로 이익이 되는 것.


이 단어를 사람 관계에서 쓰는 게 올바른가 잘 모르겠지만 이 단어 외에 생각나는 게 없다.

그런데 처음으로 실리적인 대화 말고도 일상적인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사람을 만났다. 


연락. 업무적인 관계, 가족 간의 관계, 연인과의 관계. 모든 관계에서 연락은 중요한 요소이다. 맞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 사람 사회적 합의를 모르는 건가. 소개팅남 P는 약속을 잡고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

특별하지도 색다를 것도 없는 일상적인 소소한 대화다. 


'지치는구먼.'


난 카톡을 차갑게 하는 편이다. 용건만 딱딱 말하고 끝내는 편인데 이모티콘도 감정 표현도 잘 안 해서 그런지 친구들과 종종 오해가 쌓였다.  만나면 오해가 풀렸지만 오해를 풀기 위해 해야 하는 말들이 변명처럼 보이고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단어 선택에 예민해졌고 카톡에 상대가 답장이 없으면 초조해졌다. 그래서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카톡을 안 하게 되었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카톡으로 하는 것보다 마주 보고하는 대화와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전화를 더 편해졌다. 나는 그렇게 상준이와 연애를 했다. 내 방식대로 내가 편한 대로 말이다. 


"너랑 연애하면 외로워."


상준이가 한 말이다. 그 말이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기억 속에 콕 박혀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말문이 막혔나, 아니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나.

어쨌건 난 자신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그런데 시간이라는 게 기억을 미화시키기는커녕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더라.

상준이와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난 뒤였다. 친구네 집에서 연애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연락 문제로 싸우는 연인편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답장하는 건 사회적 합의야!"

"나도 모르는 그런 합의가 있었어…?"


어이없어하는 친구의 표정. 당황한 나. 그날 엄청 혼났다.


자동문이 열리고 쿵쿵 거리는 음악소리가 들린다. 다양한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다. 키도 나이도 운동복도 다 제각각인 사람들이 헬스장에 모여있다. 새삼 운동을 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신기하다. 열정 넘치는 그 모습에 기가 죽으면서도 심장이 콩콩 뛴다.

운동을 즐기지 않지만 퇴근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헬스장을 나왔다. 그런 귀찮은 짓을 해서 헬스장에 왔지만 운동 강도는 매일 다르다. 어떤 날은 런닝머신 30분만 하고 집으로 가는 날도 있다. 헬스장에 와서 운동을 안 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 있지만 난 당당하다. 헬스장에 온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의미가 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왔잖아?

난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몇 번 손가락을 톡톡톡 하고 움직여 소개팅남 P에게 답장을 했다.


- 운동 끝나고 연락할게요!


소개팅은 연애를 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다. 노력에는 힘이 들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노력을 함으로써 오는 안도감이 있다. 헬스장에 와서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운동하러 오는 스스로의 모습이 뿌듯한 것처럼 말이다. 연애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어쩌면 연애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회에서 제일 뒤처져있는 건 어쩌면 내가 아닐까.'


피곤함을 느껴도 사회적 합의가 얽혀있어도 또다시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예의인지 도리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착해서도 아니다.

비록 아직 연애하기 전이지만 이 또한 내 노력이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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