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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Apr 02. 2020

실패할 자유

싱잉볼이 사고 싶었습니다. 싱잉볼 소리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말에 갑자기 싱잉볼을 사야 되겠어!라는 강렬한 욕구가 올라왔습니다. 네이버에 "싱잉볼"을 검색하니 네이버 추천 순대로 쪼로로~ 싱잉볼이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싱잉볼의 가격과 구매, 리뷰수를 꼼꼼히 보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이 제일 착한 곳에 제일 눈이 갔지만 리뷰가 좋지 않아 티베트에서 직접 만들었다고 광고하는 상품을 클릭했습니다. 리뷰도 많고 리뷰에 칭찬도 많고, 구매한 싱잉볼 소리까지 동영상으로 들을 수 있고... 이것을 사야지! 하는 순간... 유튜브를 검색했습니다. '싱잉볼 사는 법'... 유튜버의 직접 듣고 자기에게 맞는 것을 사야 한다!라는 말에 넘어가 다시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프라인으로 싱잉볼을 살 수 있는 곳을요.. 결국에는! 싱잉볼을 구매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다이소를 매우 애정 합니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엄마도 애정하는 장소입니다. 아이들이 치과에서 충치치료를 받거나, 소아과에서 중이염 치료를 잘 받았거나, 차 안에서 조용히 있었거나... 등등 아이들에게 위로와 보상이 필요할 때 아이들과 다이소에 갑니다. 갈 때마다 저는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꼭 한 개만 고르는 거야!" 아이들은 다이소에 가서 무척 고민합니다. 뭘 살까... 인생 최대의 고민입니다. 아이들이 각기 다른 물건을 고릅니다. 속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걸 사면 나중에 꼭 둘째가 첫째 장난감을 탐 낼 텐데.. 같은 것 사면 좋을 텐데...'라고요. 아이들은 물건을 하나씩 골랐지만 계속 눈이 돌아갑니다. 엄마를 한번 찔러보기 위해 저기에 또 다른 멋진 것이 있다는 것을 피력하지만 저는 크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이 물건 살 거야? 하고 다시 확인해 보면 아이들 동공에 지진이 일어납니다. 몇 번을 고르고 내려놓고 고르고 내려놓고를 반복하고서야 사고 싶은 물건을 결정합니다. 집에 와서 아이들은 종종 웁니다. "이거 말고 다른 거 사고 싶었는데!"라며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그럼 저는 여러 위로의 말을 전하며 상황을 납득시키도록 타이릅니다. 그 긴 말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네가 골랐잖아. 끝이야."



제일 좋은 것을 고르려다가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내 모습을 보며 아이들과 다이소의 이야기가 떠올랐던 건 '결핍'때문입니다. 물건을 살 때 너무 열심히 사는 내 모습,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아이들에게 학습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속상했습니다. 나는 왜 이리도 열심히 물건을 고를까?라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나는 나의 구매가 실패하지 않길 바랍니다. 좋은 물건을 사고 싶어요. 그래서 정말 정말 정말 열심히 물건을 고릅니다. 그 행위 밑에는 한번 사면 다시 못 산다는 강한 무의식이 깔려있습니다.



한번 사면 다시 못 산다.. 는 마음은 결핍에서 기인합니다. 내게는 그럴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실패하면 안 된다. 이것은 단지 물건을 구매할 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고3 때 꽤나 성적이 좋았습니다. 모의고사를 치면 수리영역 1 빼고는 거의 만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서 성공적인 삶을 살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수능은 단 한번! 이 기회밖에 없다는 간절함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불안과 긴장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졌습니다. 수능 당일, 첫 번째 시간... 제일 자신 있던 언어영역이었으나 너무 긴장하여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해 수능은 물수능이라고 만점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다들 성적이 올랐지만 저는 성적이 10점 이상 떨어졌습니다. 크게 낙담하고 원하는 대학에도 가지 못했어요. 그날부터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매번 같은 꿈이었습니다. 수능 전날, 수능시험장으로 출발하지만 수능날 밤이 되어도 시험장에 도착하지 못하는 꿈을 10년 이상 꾸었습니다. 수능점수 10점이 저를 10년 동안 괴롭힌 이유는 무엇이엇을까요?

"나는 잘해야 해, 나는 실패하면 안 돼, 내게는 기회가 없어...." 라는 내안의 강한 부정적 신념때문이었습니다.



예전 아티스트 웨이 워크숍에서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세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예쁜 그림을 그리려고 애쎴습니다.  '잘 그려야해...앗!  근데.. 이게 뭣이라고 나는 또 열심히 하고 있는거지... 몸이 저절로 열심히 하는 거...이것도 병이야... 너무 열심히 살아. 항상 너무 열심히 해... '하는 순간!  갑자기 검은색 색연필에 손이 갔습니다. 검은색 색연필로 내가 애써 그린 그림 위를 휘갈겼습니다. 종이가 찢어질듯 세게 아무렇게나 막 칠했습니다. 통쾌했습니다. 기뻤습니다. 편안하고 후련했습니다. 참가자들에게 내가 그린 그림을 소개하며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망치고 싶었어요. 실패하고 싶었어요."


잘해야 해, 실패하면 안 돼,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 삶은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심장 떨리고 위태롭고 공포스럽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실패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나도 모르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내게 아직 남아있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리고 저에게 실패할 자유를 주고 싶습니다.  실패를 여러 번 해봐야 진짜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실패를 여러 번 해봐야 나에게 기회가 여러 번 있음을 알 수 있으니까요.


실패할 자유가 있을 때,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경험으로 변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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