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게 도둑질이면 도둑질하며 살게 된다.
여자가 음식을 잘하면 평생 부엌에서 못 벗어 나.
그러니 넌 요리 같은 거 배우지 말고 공부나 해라.
학창 시절, 엄마를 돕겠다고 주방에서 쭈뼛거리면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차라리 방에 들어가 소설책이라도 읽으라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남아선호 사상에 지독하게 찌들어 사셨다. 아들들은 소를 팔아서라도 가르치려 했지만 딸들은 일만 시키고 국민학교에도 보내지 않으셨다. 공부를 너무나 하고 싶었던 엄마는 10살이 되자 할아버지 몰래 십리가 넘는 국민학교에 가서 스스로 입학 신청을 하고 할머니가 챙겨주는 쌈짓돈으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엄마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한을 나를 통해 풀려고 하셨는지 남동생보다 나를 더 많이 가르치셨다. 더 좋은 학원에 보내주고 더 비싼 과외를 시켜주고 집안일은 단 한 번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난 서른이 넘도록 라면이나 겨우 끓여먹을 수 있었다. 친구들보다 늦은 결혼을 하고도 밥을 할 줄 몰랐다.
엄마의 예언 아닌 예언처럼 만약 내가 요리를 할 줄 알았다면 나는 시부모님의 식모가 되어 주방에서 벗어나지 못할 뻔했다. 시어머니는 요리를 잘하셨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입맛이 아주 까다로워 밖에선 전혀 사드시지 않고 집에서 삼시세끼 시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만 드셨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결혼시키자마자 며느리를 주방으로 밀어 넣고 본인은 자유를 찾고자 하셨다. 이제 며느리가 생겼으니 당신은 주방에 들어갈 일이 없는 거라며 친구분들과 해외여행을 가셨다. 그리곤 며느리인 나에게 시가에 와서 시아버지 밥을 해서 바치라 주문했다. 그리하여 생전 처음 냉면을 끓였는데 면이 다 불어 묵처럼 되어 가위로 숭덩숭덩 썰어서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했다. 입맛이 까탈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 양도 새 모이만큼 드시는 시아버지의 입에 내가 한 음식이 맞을 리 만무했다. 된장찌개를 끓여 드리면 젓가락 한 짝으로 ‘콕’ 찍어 맛을 보고 상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젓가락을 놓고는 한 손으로 상을 ‘쓰윽’ 밀어내셨다. 옥수수를 쪄드리면 딱 한 알을 떼어 맛보고는 ‘뭐 이렇게 삶았냐?’ 면서 그릇을 쓱 밀어내셨다.
천만다행이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요리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만약 엄마가 나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었다면 나는 정말 끔찍한 결혼 생활을 할 뻔했다. 시아버지는 내가 한 모든 음식을 거부하셨고, 그래서 시어머니는 나를 주방으로 밀어 넣을 수 없었다. 나는 엄마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감사했다.
엄마는 요리를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여자도 꼭 사회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하셨다. 결혼을 해서도 반드시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 남편한테 기대지 말고 살라고, 돈이 없으면 남편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니 여자도 큰소리치며 살려면 꼭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하셨다. 엄마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나의 꿈 때문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아이를 낳고도 50일이 채 되지 않아 일을 시작했다. 모든 워킹맘들이 겪는 고통이겠지만, 어린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을 하는 것은 정말 만만한 일이 아니다. 뭐든 주는 대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서 쑥쑥 크는 아이라면 엄마의 심장이 오그라 붙는 듯한 고통이 좀 덜할까 싶지만, 내 아인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안 먹고, 안 자고, 안 싸는 아이다. 태어날 때부터 작게 태어나기도 했지만, 또래 평균 키와 점점 차이가 나더니 어느새 15cm로 벌어져 있었다. 친구들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작은 키로 또래들 사이에 서 있는 아들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성장전문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며 아침은 간단한 인스턴트로, 점심은 학교 급식으로, 저녁은 외식으로 먹는 생활을 하고 있다 했더니 의사가 한숨을 쉰다. 나도 한숨이 나온다. 6개월만이라도 집밥을 좀 해서 먹이면서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잔다. 의사의 말을 들으니 밥하기 힘들어 외식하러 가자고 하면 엄마가 해준 밥이 맛없어도 괜찮으니 집에서 좀 먹자던 아들의 말이 생각나 울컥했다. 하지만 매일 집밥이라니!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나로선 참 암담한 해결책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79일째 일을 쉬고 있다. 계획에 없던 장기 휴가다. 대학 졸업 후로 이렇게 길게 쉬어본 게 처음이다. 덕분에 아들에게 집밥을 해 먹였다. 할 줄 아는 반찬이 몇 개 없어 주로 생선구이만 먹었는데도 아이가 두 달 만에 1.8cm나 컸다. 일 년에 5~6cm 정도 크는 아이니 이 정도 성장이면 희망이 보였다. 쉬는 동안 살림이라는 것도 적극적으로 해보았다. 어라, 꽤나 재미있다! 특히 요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미처 몰랐다. 까나리액젓이라는 것을 써보니 신기했다. 액젓 하나 넣었을 뿐인데 맛깔스러운 부추김치가 뚝딱 만들어지다니! 삼겹살을 구워 부추김치와 먹으니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 한 그릇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제 친정 엄마가 가르쳐주지 않은 도둑질을 배워야겠다. 나는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니까.
100가지 음식 만들기에 도전!
벌써 첫 번째 도전은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김치를 담가보았다. 오이소박이. 찰 밀가루로 풀도 만들어 넣었다. 신기하다. 호들갑스럽게 남편을 불러 마흔이 훌쩍 넘어 처음으로 김치를 만들어 본 환희의 순간을 함께 해달라고 요청한다. 남편이 옆에 서서 박수를 치고 쌍따봉을 날리며 응원한다. 이제 윤기가 좔좔 흐르는 갈비찜도 배우고, 매콤하고 짭조름하게 꽈리고추가 툭 터지는 제육볶음도 해보고, 비 오는 날 후후 불며 후루룩 떠먹을 뜨끈한 감자 수제비도 도전해야겠다. 아들의 키를 쑥쑥 키워주고 살을 통통하게 찌우게 할 맛있는 요리를 하며 행복한 엄마로서의 삶을 만끽해야겠다. 남편과 아이의 박수를 받으며 늦게 배운 도둑질로 날을 한 번 새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