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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클레어 Feb 23. 2024

이 겨울을 지나는 방법

  겨울이 싫다. 이유를 꼽아보자면, 밖에 나가려면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서글프다. 눈이나 비가 오면 우산을 하나 들고 둔해진 몸에 넘어질까 전전긍긍. 옷의 부피가 커서 부지런히 세탁기를 돌리지만 빨래도 쌓이는 것 같고, 차를 운전할 때도 창안에 가득 찬 성애, 늦게 뜨고 빨리 져버리는 해. 정말이지 효율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얼어붙은 일상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차갑게 만든다.

 

  사람들은 가끔 인생에서 겨울을 지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 때가 있다. 좀처럼 하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공부하던 시험에서 자꾸만 낙방할 때, 수 없이 쓰는 입사 지원서, 새벽 근무에 들어갈 때 이슬이 내린 도시의 축축한 냄새, 그나마 건강 하나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 내 맘과 같지 않게 여기저기 쑤시고 아플 때 겨울이 아닐지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몇 해 전 겨울, 어느 날 ‘번아웃’이 찾아왔다. 내가 겪은 번아웃은 이랬다. 번아웃은 자기의 일을 사랑하는 누구에게 언제든지 올 수 있다. 한 번에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내 마음을 좀먹다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처음에는 누구나 열정이 있고 꿈과 희망이 가득한 상태로 일을 선택한다. 현실이 기대와 달라지면 어느 틈에 지친다. 지친 마음은 다시 충전해서 회복해야 하는데 그냥 내버려 둔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고장이 난다.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 보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나에게 기운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나를 돌볼 기력조차 없다. 그러다 어느 날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올 만한 힘도 없어지면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나 참 열심히 하지 않았냐고 원망도 하고 후회도 하게 된다. 그렇게 해도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이 공허한 마음에는 오히려 어떤 것도 채우지 못하게 된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가족들의 걱정과 동료들의 응원, 친구들은 재촉하지 않고 좁은 문을 열고 나오길 기다려 주었다. 마음이 힘들면 목적지도 없이 고속도로를 달렸다. 운전하는 시간은 운전에 집중해야 하니 잡생각이 없어 오히려 좋았다. 빠르게 달려도 느리게 달려도 저마다의 속도로 각기 다른 목적지로 가게 된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차 안에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달렸다. 신나는 음악을 틀면 클럽이 되고, 재즈를 틀면 재즈바가 되었다. 클래식을 틀면 살롱이 되고, 발라드를 틀면 1인 노래방이 되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가는 곳이 있으면 차를 세웠다. 그때 만난 남도의 겨울은 언제나 푸른 바다와 초록빛을 내어 주었다. 시골 마을에 펼쳐지는 한적한 풍경들은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겨울의 시골 마을은 그저 쉬는 것이 아니라  닥쳐온 겨울의 대비와 다가올 봄을 준비한다. 두툼하게 말아놓은 볏단에서, 쌓아놓은 땔감에서, 처마 안에 매달아 놓은 씨앗에서, 겨우 나온 시금치의 어린잎이 얼까 덮어둔 이불에서 느낄 수 있다.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겨울은 없다. 도시의 사람들은 겨울이 있어야 마늘과 양파의 뿌리가 단단해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더 많이 읽고, 쓰고, 오랜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을 다정하게 안아준다. 게으름을 부리고 싶으면 이불 안에서 뒤척거리기도 하고 그저 ‘멍때리기’ 하면서 쉬어가기도 한다. 길 가다 마주친 붕어빵을 품 안에 들고 오는 것은 지루한 겨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오늘은 퇴근길에 찌갯거리를 좀 사야지. 그리고 가족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왕창 넣은 묵은지 김치찌개를 끓여야겠다. 후후 불어 가면서 도란도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이야기하다 보면 이 겨울을 지나가겠지. 그렇게 하다 보면.... 그래, 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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