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시안 블루: 너에게

by 서정

어때? 많이 힘들었어?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너를 줄곧 사랑해 왔어.

너무도 여려서 모든 감정을 차단해 버린 너를, 눈에 한강을 담은 너를, 우는 방법도 몰라 핏대가 선 얼굴로 힘겹게 숨을 내쉬던 너를.



너를 눈에 담는 건 나에게도 쉽지 않았어.

너를 지켜보기 어려운 날엔 큰 결심을 하고 나의 양 눈을 가린 채, 잘 벼린 칼을 쥔 너의 양손을 있는 힘껏 쥐어도 봤고, 그러다 질척한 늪이 되어 여기저기 눌어붙은 너를, 나의 팔다리에 시퍼런 멍을 남겨서라도 안간힘을 다해 떼어내기도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곁을 떠나지는 않으면서 맴돌기만 오래도 했다.


그래서 난 널 떠날 수 있었어. 버린 게 아니야.

네가 죽음을 맞이하는 날까지도 나는 너의 곁에 있었어. 제발 잊지 말아 달라는 너의 말에, 숨 쉬듯 애원하는 눈빛에, 서슬 퍼런 울음에. 그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답은,



나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너의 마지막을 담았어.

너의 피는 검었어. 늘 위태로운 정적을 유지하던 너와는 달리, 너를 구성하는 것들은 격렬하게 너를 지켜 왔었나 봐.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울 게 분명한데도 최대한 힘을 빼려 노력한 게 보이는 몸에서는 검은 액체가 사출했어. 나는 눈물 한 방울 없이 너를 안았고, 비릿한 조소와 끈적이는 울분이 나를 뒤덮었던가, 집어삼켰던가.


한껏 검어진 나를 본 너의 웃음 같은 말소리를 들었어.

'미안해. 기껏 차려입었는데. 보지 마. 잠깐만...' 남은 힘을 다 쥐어짜 내 옮긴 앙상한 팔이 닿은 허리께는 불에 덴 듯 뜨거웠고, 소금기 어린 물자국이 하염없이 생기고 사라지던 볼은 금방이라도 얼어버릴 듯 차가웠어. 신음인지 숨소리인지 모를 문장이 귀를 때리고, 이내 떨림이 멈춰오고. 너의 마지막 말이 나를 그곳에 얼마나 잡아뒀는지 너는 알까.


이제 행복할 수 있을 거라니. 너 정말 못됐어.



있지,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늘 자유를 갈망하던 너였으니 어디든 갈 수 있게 바다에 놓아줄까 싶었는데, 넌 수영도 못하고 추위도 많이 타잖아. 유독 외로움에 기민하게 반응하던 너를 망망대해에 버려두고 싶지는 않아.

산으로 가자니 벌레도, 산짐승도, 밤이 되면 스산한 분위기까지 혼자서 온몸으로 맞고 있을 네 모습이 떠올라 오를 수 없었어. 그리고 나도 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남들 다 가는 곳에 보내줄까 생각도 했는데, 그러기엔 넌,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이에서 너무 지쳤으니까. 어딘가에 매여 있을 때 누구보다 안정적이었지만 자유를 찾았을 때 너무 눈부시게 빛나던 네가 떠올랐어. 마지막까지 너를 가둬두고 싶지 않아.

역시 네가 그토록 애증하던 한강이 되게 해줄까 싶었는데, 여전히 모르겠어. 나와 같이, 늘 돌아올 곳이 필요하던 너니까.



안간힘을 다해 평정심을 잃지 않던 그날의 너를 기억해. 어쩌면 사회가 규정하는 '너 다운 너'의 마지막 모습이었겠지. 제법 건조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뱉은 세 음절이 참 안타까웠어. '도망쳐'하는 입모양과는 달리, 눈에서는 꽤나 큰 두려움이 보였거든.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망연히 빛줄기를 따라 걷다 보면,

쳐다보는 시선들에 몸을 떨다 멈추길 수백 번.


너의 커다란 몸이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내 귀에까지 닿지 않은 건 어쩌면, 내가 널 반드시 떠나야만 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네가 물들여 깔아놓은 검정 위를 걸어서 다시 너에게로 갈게. 티 하나 없는 새하얀 구두를 신고, 기꺼운 발걸음으로. 아직은 울음 없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단어지만, 그땐 꼭 가볍고 산뜻한 목소리로 얘기할 거야.


사랑해. 온 힘을 다해서.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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