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일 라일락: 포기(foggy)

by 서정

왜 날 아끼냐는 못난 질문 아닌 질문에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던 물기 어린 눈이 있다.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돌아온 건 생뚱맞게도 난 너를 버리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서로를 있는 힘껏 껴안고 겹쳐 조금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조바심이 나도 털 끝 하나 닿지 않고 바라만 보는 사랑이 있다.

너는 나를 지켜보겠다 했다. 내가 나를 열어보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그전부터,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변함없이 그리 멀지는 않은 곳에서 너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누구도 손을 뻗지 않고.


요란법석 떠는 걸 싫어한다. 곁에 두고 보면 부산스러운 게 꽤나 귀여워 보이기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 장황한 말과 화려한 치장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럴듯한 것들은 대개 그럴듯한 데서 멈춘다.

어쩌면 진짜라는 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내가 믿는 건 알량한 진짜가 아닌, 진실이다.



그래서 우린 사랑이란 단어 없이 사랑을 말했다.


맨발로 걷는 법이 익숙지 않아 자꾸만 휘청이던 내가 이윽고 넘어지는 걸 보고서야 너는 한 마디를 건넸고, 금이 간 유리탑 위에서 위태로이 춤을 추던 네가 균열 사이 유일한 파편이 되고서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착지하는 법을 배운 나는 추락하는 너를 보며 뼛조각을 산산이 부쉈으며, 일어나는 법을 배운 너는 이리저리 구르는 나를 보며 온몸의 핏줄들을 터뜨려댔다.

거울 속에 비친 몸은 지독히도 볼품없었으나, 나의 눈에 비친 네가 너무도 어여뻤기에. 수많은 밤을 부수고, 터뜨리고, 무너뜨리다 맞이한 건 수백 갈래로 조각난 낮이었다.


우리의 낮은 스테인드 글라스였다.

한 톨의 온전한 빛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낮조각들을 붙이고, 또 붙이고. 그렇게 만든 견고한 방 안에는 제멋대로 굴절된 햇살이 희뿌연 안개를 만들어냈다. 우린 구름 없이 흐림을 만들어 내는 재주를 부리며, 곱게 가루가 된 빛무리를 손에 쥐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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