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5
인천으로 이사를 온 뒤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첫 자발적 일기였다.
내게 일기는 언제나 숙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이후로 단 한 번도 일기를 써 본 적이 없었으며, 쓸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귀찮은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기에 대한 로망은 자주 품어왔어서, 반기에 한 번 정도는 꼭 다음 주부터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곤 했었다. 다음 주는 쉽게 다음 달이 되고 다음 해가 되었다. 무엇이든 시작은 정시나 정일에 해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이 내겐 있어서, 나의 첫 자발적 일기는 미뤄지고 미뤄져 2020년이 되어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일기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강박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앞서 말한 정시 강박을 비롯하여 수많은 강박들을 가지고 있다. 책을 읽을 때에는 책이 상하지 않게 예각의 각도로 펼쳐서 보거나 손때가 묻지 않도록 자주 손가락의 위치를 바꾸어 주어야 하는 독서 강박, 통장 잔고는 언제나 만원 단위 혹은 십만 원 단위로 떨어지게 맞추어 놓아야 하는 잔고 강박―돈을 아끼거나 돈을 쓸 때 좋은 합리화 근거가 된다―, 정해진 기간 내에 시를 반드시 한 편은 꼭 써야 하는 시 강박―이 강박은 작년에 내 정신을 너무나 좀먹어서 상담을 받아야만 했다― 등이 있다. 강박은 나를 몰아붙이고 좀먹는 나쁜 습관이지만, 때론 사소한 강박들이 삶의 소소한 재미를 주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그냥 용인하는 편이다.
일기는 2월 3일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막 한 달을 넘겼다. 처음 2주는 일기 쓰는 데에 재미가 들려서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썼다. 그러다 조금씩 귀찮아져 어제는 쓰지 않은지 5일째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강박의 결과였다. 나는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해서, 시든 일기든 손으로 써야 제대로 쓰는 거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몰아치는 생각의 흐름을 한 번에 손으로 써 내려가기엔 일기는 꽤 힘든 일이었고, 자연스레 일기를 ‘손으로’ 쓰는 일이 귀찮아지게 된 것이다. 글은 손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 새삼 새롭게 발견한 강박이다.
그래서 이제 인스타그램(그리고 브런치)에 일기를 올리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노트북으로 시를 쓰게 된 지 1년 남짓만에 거둔 성과다. 이제 나도 해묵은 강박에서 벗어나 정보화 시대에 적극 편승하기로 했다. 어젯밤 문보영 시인의 『배틀그라운드』를 읽다가 문보영 시인의 일기가 떠오른 것이 트리거가 되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일기를 업로드할 작정이다. 하루에 한 번, 말 그대로 일기를 써보려 하다가 또 강박이 될까봐 조금 느슨하게 마음을 먹었다. 조금 더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시간이 더욱 재미있는 습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고 쓰는 데에만 갇혀 나의 내면을 돌보지 못하게 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인 삶, 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기쓰는 삶, 정도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 아직 손때도 안 탄 18000원짜리 일기장과 2000원 단위로 마감된 채 월급을 기다리고 있는 통장 잔고에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