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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과 파

200315

by 이건우

냉장고에 넣어둔 파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를 다시 씻고 잘게 썰어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얼려놓은 파는 꽤 요긴하게 쓰인다. 라면을 끓일 때 한 움큼 넣어 끓이면, 라면을 먹는데도 내가 나를 잘 챙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넓은 집으로 이사를 온 뒤부터 요리를 즐기게 되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즐겁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료를 손질하는 일이 즐겁다. 특히 파를 써는 일이 재밌다. 기다란 파를 송송 썰 때의 리듬이 흥겹고, 썰린 파의 단면이 귀엽다. 요리를 하면서 파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파에는 스펀지 같은 심지가 있고, 이 심지가 맛을 낸다.


하지만 칼질이 아직 서툴고 느린 편이라 파를 오래 썰고 있으면 눈이 맵다. 양파를 썰 때 눈물이 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파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파를 썰면 눈물이 난다. 감정이 없어도 눈물은 날 수 있다.


흄(D. Hume)은 인간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에 시인의 감정을 느끼고, 고통을 주는 것에 부인의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시인의 감정과 부인의 감정. 고등학생 시절 윤리와 사상 공부를 할 때나 윤리교육 전공으로 임용고시 공부를 할 때, 그리고 이제는 수업 준비를 할 때, 흄을 볼 때마다 실없는 말장난이 자꾸 생각나곤 했다. 시인의 감정이란 쾌락을 주는 것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우리는 쾌락을 느낄 때 시인이 된다. 내겐 아직 부인이 없으므로 애인의 감정이 괜찮겠다. 애인은 고통에 거부감을 느낀다.


내게 즐거움을 주는 일들은 내 마음에 곧장 가닿는다. 나는 슬픔보단 즐거움에 민감한 편이다. 즐거움을 느낄 때마다 시와 가까워진다. 그러나 시인의 감정과 시인의 일은 달라서, 나는 쉬이 애인의 감정이 된다.


오늘은 애인이 곁에 없어서 혼자 파를 썰고 밥을 해 먹었다. 파를 써느라 눈물이 났지만 감정과는 무관한 일이었고, 차라리 시인의 감정이었다. 파를 써는 일은 즐겁고, 시를 읽는 일도 즐겁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시인의 감정도 애인의 감정도 아니다. 시를 쓰는 일은 내게 어떤 감정일까. 흄과 파를 번갈아 생각한다. 흄파흄파, 들숨과 날숨처럼, 시를 쓰지 않는 저녁의 감정은 이토록 들락날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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