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8
이사 온 집은 볕이 잘 든다. 전에 살던 집은 비좁고 사방이 건물로 막혀 있어서 자주 우울해지곤 했다. 그러나 이곳은 남동향이라서, 해가 질 때까지는 불을 켜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밝다. 넓은 유리창도 채광에 한몫을 해서, 나는 하늘을 보는 일이 잦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짙푸른 하늘이 모든 것을 용서할 것처럼 펼쳐져 있다. 요즘 같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푸르러서, 나는 여러 겹의 생활을 살기도 한다.
하늘을 자주 본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은 때로는 틀리지만 때로는 맞다. 적어도 지금 내겐 후자다. 나는 하늘을 보는 일이, 구름을 보는 일이, 하늘의 색깔과 구름의 모양을 이름 짓는 일이 즐겁다. 나는 생활이 만족스럽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하늘이 있고, 오른편으로 돌리면 햇볕과 햇볕이 만드는 그림자가 있다.
나는 그림자를 사랑한다. 때로 어떤 사물보다 그 사물의 그림자가 더욱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빛과 어둠이라는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오전 9시 즈음부터 오후 1시까지는 강한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집 안에는 수많은 그림자들이 즐비해 있다. 집 안의 모든 사물들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다들 너무나 살아 있어서 나는 간혹 움츠러들기도 한다.
오후 5시 즈음부터는 서편으로 넘어가던 태양이 건너편 아파트 창문에 반사되어 집안으로 되돌아온다. 어둠을 준비하던 방은 20분 남짓의 시간 동안 다시 밝아진다. 오전보다는 조금 더 높은 채도로 밝아진다. 나는 이 시간을 사랑한다. 빛을 배웅하는 그림자의 시간. 사물들은 고귀한 색을 내며, 그림자는 조금 더 옅고 모호하다.
이 시간 동안에만 허용되는 것이 있다면, 태양을 바라보는 일이다. 창문에 비친 태양은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만 눈이 부셔서,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봄이 허용되는 시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잔상이 눈 위에 남는다. 무엇인가가 남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욱 살아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림자는 서서히 흩어질 것이고, 잔상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 끝내 사라지는 것만이 가장 살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각자의 색으로 살아 있는 시간. 강렬한 태양과 짙푸른 하늘 아래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 나는 이것을 빛의 가장자리라고 부를까, 빛과 어둠에 끼인 시간이라고 부를까. 건너편 아파트 주차장에서는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그들의 얼굴 위에 잔상이 아직 겹쳐 있다. 잔상이 사라질 때까지, 내 생활 속에선 그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