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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롭게 떠오른 사라짐을 봐요

200419

by 이건우

비 내리는 밤이면 문득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7년 전 그날 밤 나는 고3이었고, 심야자습을 했다. 심야자습은 8명 남짓의 학생들만 남아서 했기 때문에 학교는 컴컴했고 조용했다. 10시가 넘어 모두가 집으로 가던 북적임과 이내 찾아오는 적막함은 컴컴한 하늘과 주황빛 거리의 대비처럼 멜랑콜릭했다. 심야자습이 늘 피곤과 유분에 찌든 시간이었음에도, 내가 그 시간을 퍽 좋아했던 것은 아마도 그 멜랑콜릭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밤은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밤이었고, 나는 우산이 없었다. 자습이 끝나기 10분 전에 아빠는 내게 데리러 온다고 전화를 했다. 내가 먼저 전화를 했는지 아빠가 먼저 전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습이 끝나기 2분 전에 미리 빠져나온 교문 앞엔 아빠가 있었고, 아빠가 서 있었는지 걸어오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아빠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네,’라고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생각에 채 잠기기도 전에 아빠는, ‘이럴 땐 <추적자>를 봐야 딱인데.’라고 말장난을 쳤다. <추적자>는 당시 아빠가 즐겨보던 드라마의 제목이었고, 평소 말장난을 즐기던 우리는 실없이 웃으며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걸어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가니 <추적자>는 끝난 뒤였다.

비 내리는 밤이면 그때의 말장난이 떠오른다. 특별할 것 없는 기억이지만, 그 특별할 것 없음이 나에게는 아주 오래도록 남는 기억이 된다. 특별할 것 없는 기억은 특별한 기억들보다 그것이 담고 있는 감정이 작거나 가벼워 쉽게 변질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껏 특별했던 기억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짙은 감정으로 인해, 사건은 지워지고 순간의 이미지와 감정만이 남아 있게 되곤 했다. 때문에 나의 기억들 중 상당수는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또한 기억은 그것을 떠올리는 시점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조금씩 변질된다. 변질된 기억은 감정의 구름이 되어 조금씩 흩어지고 옅어진다. 나는 요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어린 날들이 많음을 깨닫고 있으며, 내게 아주 오래 남아있는 기억들은 지극히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기억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지극히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기억들 중에서도 가장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기억이 있다. 십몇 년 전,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하굣길이었다. 흰색 승용차에 가깝게 붙어 걷고 있던 나는 김유신 장군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고, 뜬금없게도 이 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될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기억의 재생시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짧아지고 있지만, 흰색 사이드미러 옆에서 김유신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든 그 생각만큼은 전혀 변질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십몇 년 전의 그 기억은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기억되게’ 한 것 같아서,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의도치 않게 관여한 것 같아서, 어떤 신비한 느낌을 내게 준다. 따지고 보면 기억이라는 행위 자체가 망망한 시간의 바다 너머로 사라져 버릴 순간을 낚아채 잡아두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미 신비성을 갖긴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가 기억될 거라고 예감하는 것은 훨씬 더 신비로운 일이어서, 어쩌면 그것은 시간의 형태를 만지는 일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의 기억을 건너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추억을 떠올리는 일을 사랑하고,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르듯 반추할 기억을 골라 재생하며 잠드는 일을 즐긴다. 그런데 조금씩 나의 기억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퍽 슬픈 일이다. 그렇다면 십몇 년 전의 그 기억처럼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기억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순간을 ‘기억되게’ 하는 것, 기억을 예감하는 것으로써 무참한 시간의 흐름에 맞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남은 기억은 건조하고 투명한 어떤 생각의 형태일 것이고, 단지 미래를 예감한 듯한 느낌만이 내가 즐길 수 있는 전부일 텐데.

영원한 것보다 무상한 것이 인간적인 것이고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시간의 형태를 만지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나는 단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의 말장난을 기억하는 일에서 그때는 느끼지 못한 모종의 짙은 서정을 느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제껏 특별할 것 없어 선명하게 남아 있던 그 기억 또한 그것을 새롭게 덮은 짙은 감정 탓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임을 슬프게 예감할 뿐이다. 나는 차라리 그 편이 사랑할 만하다고 느낀다.

* 새소년, <나는 새롭게 떠오른 외로움을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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