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03
구원에서 벗어나야만 구원될 수 있다. 구원하는 자는 나다. 내게 매여 있는 줄을 단칼에 잘라낼 수는 없을까.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한동안 멀리 했던 니체를 꺼내 읽고 싶게 되었다. 주인공이 아폴론적이라면 조르바는 디오니소스적이다. 주인공은 조르바를 통해 스스로의 부처를 지워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끝끝내 "무지 무지 아름다운 초록빛 돌을 발견했음. 빨리 올 것."이라는 조르바의 전보에도 조르바에게 가지 못한다. 주인공은 조르바를 내내 동경하지만, 그러한 동경은 명료한 이성과 항상 긴장관계에 있는 듯했다. 그것이 나는 좋았다.
조르바의 기행은 분명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아폴론적인 세계에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악마와 같다는 조르바는 외려 악마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알게 모르게 악마적 도취를 동경한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를 꿈꾸며, 아폴론적 세계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르바에게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
조르바와 주인공은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둘은 서로를 영원한 친구로 남겨 두었다. 주인공은 조르바의 죽음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는 자유인으로서 살았을까.
빛이 우리를 붙들어매는 줄이라면, 우리는 그 빛을 잘라낼 수 있을까. 우리가 허공에 매달려 있대도 그럴 수 있을까. 누구나 조르바를 꿈꾸지만 누구도 조르바가 되지 못한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 그냥저냥 산다. 나는 그것이 좋다. 자유와 도취를 꿈꾸며 아둥바둥 사는 그런 삶들이 좋다. 가슴 속에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모두 살아 있는 그런 삶. 빛과 어둠, 도덕과 자유가 서로 밀고 당기는 긴장 속의 삶. 끝내 구원되는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니체는 위버멘쉬의 마지막 경지로 어린아이의 경지를 들었다. 노자는 영아(嬰兒)의 상태로 돌아가라 했다. 젖먹이에겐 구원도 도덕도 없다. 조르바가 그랬던 것처럼.
"대장, 봤어요? 돌들은 내리막길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납니다!"
"무지 무지 아름다운 초록빛 돌을 발견했음. 빨리 올 것."
이런 것에 자유가 있을 줄로 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