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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내 시보다 더 가취있기를

191101

by 이건우

나는 왜 시에 모든 것을 걸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미워하고 책망하던 때가 있었다. 시를 앞에 두고 주저하다 주저앉고 다시 일어났다 주저앉기를 반복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내게 있어 처음으로 '시를 쓰지 않는 내'가 등장했던 때였다. 시를 쓰고자 했던 순간부터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시를 생각하지 않는 하루를 살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때부터 '시를 쓰는 나'와 '시를 쓰지 않는 내'가 마음을 두 편으로 쪼개어 영역을 가르고 다투기 시작했다.

마음에 자리한 두 자아의 경계는 나를 옭아매는 강박으로 드러났다. 나는 '시를 쓰지 않는 나'에게 단 일주일의 자유를 허락했고, 나는 또 시를 써야'만' 했다. 그런 강박은 서서히 누출되고 있는 가스 같아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쪽은 어떤 지독한 기분들로 차올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20년 넘도록 무사태평한 성격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기분과 강박이었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나 자신에 대한 규정은, 나를 한껏 고양되게 하였다가도 곧바로 나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마 그때의 지독한 기분들은 반복된 상승과 추락으로 인한 멀미 같은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런 기분에 시달리지 않았다. 뭐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시를 쓰는 나'를 재워뒀기 때문이었다. 현실의 힘이 그만큼 강력한 것이고, 내가 시에 모든 걸 걸어버릴 수 있을 만큼의 배짱 또한 없는 것임이 결국 밝혀진 것이다. 여하간 마음 한 구석에서 시를 쓰는 내가 곤히 자고 있으며, 나는 그런 사실을 씁쓸하지는 않게 곱씹었다. 오히려 어떤 달짝지근한 맛이 배어 나왔다. 나는 차라리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시를 쓰는 나'는 애초에 허상이었다. 시는 내가 쓰는 것이지 어떤 내가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던 것일까. 마음 한 구석을 다시 들추려 가보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치열한 현실은 오히려 나를 정화시켜주었다.

이런 정화는 나도 모르는 새 꽤 오랫동안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시라는 게 인생을 걸어버릴 만큼 대단히 고귀한 것은 아니란 것을 깨달은 뒤로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나를 존중하기로 했다. 모두가 소중한 것처럼, 모든 삶이 소중한 것처럼, 나도 내 삶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나'도 '시를 쓰지 않는 나'도 소중했듯,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 우상에 제물을 바치지도 않을 것이다. 내 삶을 시 따위에 바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없는 삶은 살 만한 맛이 없다는 것. 시는 삶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또 그 정도의 가치는 있는 것이어서, 시를 뺀 삶은 그것을 뺀 정도의 가치만을 갖는 것이어서, 나는 시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시 따위에 인생을 걸 만큼 시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시 없는 삶에 재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가치는 분명 있는 것이다. 딱 그 정도의 가치, 그것만으로 나는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시에 인생을 걸지는 못해도, 시와 더불어 걷는 삶이라면 꽤 훌륭한 삶이 될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내 마음에 들어앉고 있다. 또 다른 '나들'이 다시 갈라먹기엔 꽤 단단한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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