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6
오늘 날씨는 따뜻했다. 4월의 절반이 지나서야 따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올봄은 꽤 더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유독 더딘 봄이다. 더디게 오는 봄처럼, 내겐 6년 전의 봄 또한 더디게 왔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이 기억해야 한다. 오늘은 기억해야 하는 날이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한다.
6년 전 오늘은 수요일이었고, 나는 전공 수업을 듣고 있었다. 새내기였던 나는 수업 중에 딴짓을 자주 했고,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네이버나 들락날락거렸다. ‘진도 여객선’, ‘여객선 침몰’과 같은 말들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고, 쉬는 시간에 뉴스속보를 틀어놓고 이게 무슨 일이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이내 ‘전원 구조’라는 속보가 떴고 우리는 함께 안도했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참담한 마음이 되었다. 페이스북에는 무사 구조를 염원하는 글들이 계속해서 올라왔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밤을 지새우며 안타까워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때의 마음만큼은 생생해서, 아직도 큰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그것을 작년 강원도 산불 때가 되어서야 알았고, 그만큼 6년 전의 봄은 내게 더디게 온 것이다.
“별이 못이라면 길이를 잴 수 없이 긴 못, 누구의 가슴에도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은 못입니다 / 오늘 밤하늘은 밤바다처럼 빛을 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 (…) / 빛을 비추며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 서로서로 빛을 비추며 죽은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 어디서 날이 밝아온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빛, 김행숙)
그날 밤하늘에 별이 떠 있었는지, 얼마나 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컴컴한 방 안에서 밤새 지켜보았던 노트북 화면이 내가 그날 밤에 보았던 유일한 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담한 마음이었을까. 나는 날이 밝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찾기 위한 빛에 고작 노트북 화면밖에 보태지 못했다. 아마도 모두가 그러했으리라. 그날의 밤하늘은 유독 빛을 내는 것이 가장 어려운 밤하늘이었으리라.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은 못이 박혀 있게 되었으리라.
우리의 가슴에 박혀 있는 못은 못[池]이기도 해서, 해마다 그날은 출렁이며 온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날의 출렁임은 조금씩 잦아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하고, 말해야 하고, 써야 한다. 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우리의 목소리를 빌려야만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에코의 초상, 김행숙)
우리 가슴의 못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날의 출렁임은 잦아들 것이고 잔잔해질 것이고 고요해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얼굴을 보게 될 것인가. 자기 가슴속에서 자신의 얼굴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얼굴을 위해서 우리는 아, 하고 입을 벌려야 한다. 입을 벌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 물결처럼 // 우리는 깊고 / 부서지기 쉬운 //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인간의 시간, 김행숙)
가슴속에서 물결처럼 오는 그들을 풍덩 껴안아야 우리는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인류애를 실현하는 방법은 우리 가슴의 못을 들여다보는 일에서 시작하고,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일을 거쳐야 한다. 이토록 깊고 부서지기 쉬운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그날의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시간을 인간의 시간이라 부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