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4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바라는 정신은 회의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133)
안티크리스트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적 사고방식을 경멸과 혐오를 담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삶을 병들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깨부수고자 하는,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정신’은 이토록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내가 성직자였거나 칸트였다면 니체를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 고소해 따끔한 법의 맛을 보여주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마저 했다. 그만큼 신랄하고 강력한 비판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에게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도덕은 한낱 천하고 타락한 약자들의 기만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힘에의 의지가 쇠퇴하는 곳에서는 항상 생리적인 퇴화, 곧 데카당스도 보인다. (…) 데카당스의 신성은 이윽고 필연적으로 생리적으로 퇴화된 자들, 즉 약한 자들의 신이 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약한 자라고 부르지 않고 ‘선한 자’라고 부른다.” (45)
“신은 생을 성스럽게 변용하고 영원히 긍정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생을 부정하는 것으로 퇴화되고 말았다. (…) 신은 ‘차안’에 대한 온갖 비방과 ‘피안’에 대한 온갖 거짓말을 위한 정식(定式)이 되고 말았다! 신을 통해서 무는 신격화되었고 무에의 의지는 신성한 것이 되었다!” (48)
근본적으로 니체는 혐오주의자다. 그는 형이상학을, 그리스도교를, 사제들을 혐오한다. 그래서 나는 니체에 빠졌었고, 니체는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니체는 미쳤다고 생각했고, 니체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는 장애인을, 여성을, 약자를 혐오한다. 근본적으로 니체는 혐오주의자다.
한동안 니체를 증오하여 니체를 멀리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들추어 볼 가치가 있다. 모든 병적 가치를 뒤집어엎어야만 한다는 발상, 삶을 배반하고 병들게 하는 것은 망치로 때려 부숴야만 한다는 발상, 기어코 한 시대를 박살내어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그 발상. 현대인은 니체에게 어느 정도는 빚을 지고 있다.
“덕이란 우리들 각자가 만들어낸 것이어야 한다. (…) 우리 삶의 조건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삶에 해롭다.” (33)
“‘천국’이란 마음의 한 상태다. ―‘지상을 넘어서’ 혹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데도 없다.” (84-85)
우리의 삶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를 다른 존재에 의탁하는 존재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존재다. 그 누구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담보로 내걸지는 않는다. 그런 자는 백치거나 데카당이다. 더 나은 삶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의지에서 나온다. 천국은 스스로 천국에 살겠다는 자에게만 나타난다. 그 누구도 나를 천국으로 데려갈 수 없다. 그 누구도 나를 나의 삶 바깥으로 내몰 수 없다.
니체가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의 단골 출연 사상가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니체를 휴게소 매점 포켓북에서도, 화장실 소변기 위에서도 볼 수 있다. 그토록 멀리 하고 싶어도, 언제나 가까이 있다.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했기에, 우리의 삶 곳곳에서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삶의 중심을 삶 안에 두지 않고 그것을 ‘피안’으로 ― 무(無) 속으로 ― 옮겨놓는다면, 삶으로부터 중심을 박탈하는 것이 되고 만다.” (101)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고리타분한 질문엔 고리타분한 대답, 너는 너의 삶을 살아라. 살아도 살아도 더 살고 싶은 삶을 살아라. 너는 강하다. 그 누구도 너의 삶을 빼앗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