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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답 없는 인간

200428

by 이건우


지금껏 많은 시험들을 치러 왔지만 심리검사만큼 나를 곤란하게 했던 ‘시험’은 없었다. 가벼운 심리테스트에서부터 각종 적성 검사까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검사는 늘 어려웠다. 남들은 휙휙 풀어 넘기는 문항들을 나는 한참동안 붙잡고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검사들은 대개 ‘네가 정말 너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니?’라며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몰랐고,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짐작의 형태였다. 아니, 체계와 경험 중에 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도대체 어떻게 아는가. 이런 문항을 1초 만에 풀어넘기는 사람은 오히려 체계와 경험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며 나는 결국 ‘보통이다’를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지금도 1부터 5까지의 척도 사이에서 답을 요구하는 검사에서 1과 5를 체크하는 경우는 드물며, 추상적으로 표현된 문항들은 대부분 3이다. 그야말로 ‘보통’인 사람이자, ‘그저 그런’ 사람이며, ‘잘 모르겠’는 사람인 것이다.

5년 전 MBTI 검사에서 나는 INTP였다. 결과지의 막대그래프는 N 항목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짧았다. 이는 내가 굉장히 직관적인 사람임을 뜻하며, 나머지는 여지없이 내가 3의 언저리에서 고민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T-F의 막대는 민망하리만치 짧은 형태로 T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1년 전에는 INFP가 나왔다. I는 더욱 길어졌고 T는 F로 바뀌었다. 나는 INFP라는 결과가 퍽 마음에 들었다. 열정적인 중재자라니,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니, 이보다 나를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 있을까.

그러다 얼마 전 MBTI가 유행을 하기에 다시 검사를 해보았는데, 이번엔 INFJ가 나왔다. 물론 이번에도 3의 언저리에서 헤맸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검사 결과를 찬찬히 읽어보니 크게 나와 다르지 않음에 놀랐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IN인 채로 TP와 FP와 FJ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일까. 애인은 검사를 할 때마다 극단적일 정도로 명확한 결과가 나오는데, 나는 왜 늘 3의 언저리에서 방황하기만 하는 것일까. 그만큼 자기객관화가 안 된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 자신과 너무 딱 달라붙어 있어서 스스로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짐작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은 주관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객관적으로 본 나는 이미 내가 아니지 않은가. 물론 나의 주관은 나를 3의 언저리로밖에 말하지 못하지만.

중립적인 답변이 많을수록 의미 있는 데이터가 산출되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3의 언저리가 많았기 때문에 어쩌면 그 검사 결과들은 나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모습에 더욱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내가 바라는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결론. 얼추 타당한 결론이다. “딱히 바라는 거 없는데,” 내가 말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는 늘 내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한다며 회피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서 출발하는 것이었으므로, 나에게 내 자신은 늘 유예되어 왔던 것이다. INFP라는 결과를 받아들 무렵 나는 어느 때보다 강렬한 꿈을 품기 시작했고, 그래선지 나는 그 결과가 어떻든 내가 INFP라고 느낀다. INFP이고 싶다면 INFP인 것이다.

우연히 ‘MBTI 유형별 궁합’을 보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애인과 나는, 내가 INTP일 때는 최고의 궁합이고 내가 INFP일 때는 최악의 궁합이라고 한다. T와 F의 중립지역에 있는 나는 말하자면 애인에게 있어 최고와 최악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따라 최고와 최악이 갈린다는 것인데, INFP이고 싶은 나로서는 꽤 곤란한 상황이다.

“나 우울해서 화분 샀어.”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T와 F를 판별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어떻게 반응하든 간에, 나는 왜 우울하냐고 묻는 사람이고 싶다. 3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사람에게는 딱 그 정도까지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통’의 ‘그저 그런’ 나는 계속 나를 모르고 싶은 것 아닐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엔 답지가 없다. 답지 없는 시험. 그렇다면 스스로를 영원한 미답지로 남겨두는 것 또한 충분한 답지가 되지 않을까. 나를 끊임없이 유예하는 일이 오히려 나 자신과 멀어지지 않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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