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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의 역설

200520

by 이건우


글을 쓰는 주기가 길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사실 기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기도 하다. 이 글은 마지막 일기―나는 내가 쓰는 글을 일기라고 칭한다. 비록 일기의 형식이 아닐지라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글은 일기가 아니던가―를 쓴 지 12일이 지난 뒤 쓰는 글이다. 글을 쓰지 않은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계산하는 것은 과거에 내가 지독히도 겪었던 그 강박 증세가 다시 발현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강박 증세가 다시 발현된다는 것은 또 그때처럼 마음에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기분의 찌꺼기가 끼고 있다는 뜻일 테다. 자신의 몸의 변화와 건강에 대한 좋지 않은 징후를 기민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나는 나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고 어떤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기민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기분의 형태로 감지되는 것이다. 12일이라는 날짜를 셈하면서 나는 느낀 것이다.

사실 12일 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을 뿐 그동안 시도 한 편 지었고 나름 즐거운 나날들을 보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마음이 그때처럼 고약한 상태가 되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이겨냈다고 믿는 그때의 그 기분을 추억이 담긴 앨범처럼 펼쳐보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기분을 되짚는 기분인 것이다. 무엇이든 한 번 경험해 본 것을 다시 경험하게 될 때에는 그것을 처음 경험했을 때만큼의 느낌보다는 모호해지고 옅어지기 마련이다. 차를 두 번 우릴 때의 그것처럼. 나는 지금 두 번째 우린 차를 마시는 기분인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에 그 기분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변화를 두려워한다. 환경이 바뀌는 것을 불편해하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그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나를 둘러싼 것들이 변화하는 폭과 깊이가 더욱 커져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특히 요새는, 신규교사가 된 첫 해에 역병이 돌아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요새는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도무지 맥이 잡히지가 않는 상황들 속에서 보류와 유예의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변화와 결단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지금 생각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을 붙잡고 고민하는 일뿐이다. 고민하지 않는다면 안개처럼 희뿌옇고 텅 빈 기분의 늪에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없어 일도 없는 학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없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해서, 누구도 선물하지 않은 안개 같은 무력감을 혼자서 끌어올려 떠안고 있음을 뜻한다. 이쯤 되면 무력감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무력한 역설! 이 역설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없다. 나는 지금 희뿌연 기분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안개의 기분이라고 이름하였다. 나를 둘러싼 이 무력함에 이름을 지음으로써 나는 무력함을 제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개의 기분은 안개의 기분이라고 불리는 순간부터 가시적인 기분이 된다. 짙은 안개가 낀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을이 아니라 안개이기 때문이다. 안개를 볼 수 있는 순간부터, 나의 무력함은 무력(霧力)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렇다. 나는 안개를 보았고, 글을 썼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음은 볼 수 있음과 다름 아니다. 나는 안개의 기분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의식을 의식으로서 규정하는 것은 잠자기 위해서 <뒤로> 물러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보유하는 것이다. 의식은 잠잘 수 있는 능력이다.”(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p.45)

깨어 있음이 잠잘 수 있음에 의해 규정되듯, 볼 수 있음은 보이지 않음에 의해 규정된다. 안개의 너머를 보기 위해서 안개 속으로 물러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력의 역설은 오늘 밤 나를 편히 잠들 수 있게 할 것이다. 오늘은 안개의 꿈을 꿀지도 모른다. 꿈이 걷히고 잠이 걷히고 이불이 걷히고 나면, 나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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