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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편의 악

200211

by 이건우

‘근대의 실패’가 휩쓸고 지나간 인류에게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교훈이 주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악은 평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잠재된 잔혹성을 애써 부정하려 한다. 잔혹한 범죄자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그로써 우리는 은근슬쩍 우리에게서 악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교훈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어느샌가 다시 악에 악마의 탈을 씌우고 있는 것이다.

“악의 개념을 가정하고 사고하다보면 어느새 악인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 악인은 피해자가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며, (⋯) 사실 그는 피해자가 악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악의 개념을 가정하는 사고는, 각별히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잔혹 행위의 공범자로 만들지도 모른다.” (20)

부정확한 악의 개념을 상정하는 것은, 평범함의 탈을 쓴 우리의 잔혹성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날뛸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가진 악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게 할 수도 있다.” (57)

그러므로 우리에겐 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악이 평범하다면, 과연 우리의 악은 어떻게 촉발되는가.

“악한 행동은 행동을 선택하는 방법의 특수한 종류의 실패, 즉 잔혹 행위를 막는 장벽이 극복되거나 약화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105)

누구에게나 악을 가로막는 장벽이 내재되어 있고, 그 장벽을 애써 뛰어넘는 순간 악은 발생한다. 악이 평범성의 얼굴을 띠는 이유다. 애석하게도 나는 사형제 담론에서 그 장벽이 손쉽게 넘어가지는 모습을 본다. 잔혹한 범죄자가 인간 이하의 말종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잔혹범죄자가 피해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 역시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게 한다. 그렇다면 사형수의 살해와 우리의 살해는 무엇이 다른가. 비인간화는 도덕적 이탈의 하나의 메커니즘, 즉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우리가 범죄자들을 비인간적인 야수로 간주한다면, 악어를 비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 대부분의 폭력적인 범죄자들은 악어도 아니고 단순한 죄인도 아니며, 이 양극단 사이의 어디쯤 매우 혼란스러운 영역에 위치한다.” (133-134)

그렇다. 잔혹한 범죄자는 혼란스러운 영역에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을 비인간적인 야수로 간주한다면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인간적인 야수에 행해지는 형벌은 도덕이 소거된 형벌이다. 도덕이 소거된 형벌은 폭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악에 대한 이해로 돌아가야 한다.

“잔혹 행위는 실제다. 악한 행동은 실제고, 실제 악이다. 그러나 (⋯) 악의 이미지는 때로 실제가 일어나게 하고, 때로 실제의 본성을 오도하게 하기도 한다. (⋯) 단순한 이미지는 단순하고 잘못된 이해를 하게 함으로써 안심시키기 때문이다.” (169-171)

악의 이미지는 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한 도덕적 상상력을 마비시킨다. 하지만 악은 순진하고 나태한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통해 야기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명제가 주는 궁극적인 교훈은 이것이다. 전형적이고도 허구적인 악마의 이미지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안심시킴으로써 언제든지 우리로 하여금 악에 무방비한 상태로 내던져지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언제나 우리 가운데에 있는 악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실제의 악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악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밀쳐두고 그들과 대화에 나선다는 것이다. 과거의 악에 분노와 증오만을 내뱉는 것은 우리를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진상을 규명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악을 이해하기 위해 악을 직시해야 한다. 대화해야 한다.

“당신이 한 일은 용서받을 수 없지만 인간이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합니다.” (214-215)

악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우리에게 언제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가치관이 확고하고 현재 속해 있는 사회의 토대가 건전하다고 해서 자신이 거대한 악에 가담할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219) 역사가 이것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 저편의 악을 증오하지 않아야 한다. 이편의 악을 이해해야 한다. 보이는 악의 처단이 아니라 가려진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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