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9
1
불가능한 사랑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랑은 대개 폭력이다.
“사랑이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과 무의식의 사건이라면, 이 명제는 사랑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논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사랑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92)
사랑이 강점하는 우리의 시간은 매 순간이 명료한 현재로 들끓는다. 그러나 늘 그렇듯, 현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열정이 어떤 정점에 이르는 순간의 충만함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 충만한 순간의 강렬함 때문에, 그것은 완벽한 현재로 살아남는다. 그 기억으로 인해 사랑이 지리멸렬해지는 때에도, 그 순간의 영원성은 보존된다. 그 완전한 현재는, 지속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기억의 감각이 살아남아 있다는 의미다.” (21)
사랑은 그것이 끝난 뒤에도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예고 없이 침투해 온다는 점에서 폭력이다. 사랑에도 모양이 있다면, 그것은 음각의 형태일 것이므로 우리는 아프다. 들끓었던 우리의 영원한 현재들은 우리가 꺼낼 수 없도록, 그러나 우리를 떠날 수 없도록, 우리의 몸 곳곳에 새겨져 있다.
“연인의 냄새에 대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세상의 언어들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갖기 때문이다. (…) 냄새는 언제나 침묵하지만, 냄새의 기억은 가끔 유령처럼 나타나 시간을 역행하여 무한으로 스며든다. 사랑이 있었다는 것은, 그 냄새에 반응했던 어떤 몸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155)
오직 몸의 시간만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음각의 감각만이 남는다. 우리는 우리를 강점했던 사랑이 남기고간 유물들의 고고학 박물관이다.
2
그러나 사랑이 현존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뜨거웠던 현재의 순간들 속에서도 사랑은 언제나 성립한 적이 없었다. 사랑이 지배하는 ‘우리’의 제국은 아주 드넓어서, ‘너’와 ‘나’는 언제나 어긋난 시간대에 살게 되기 때문이다. 포옹으로도 우리의 시차는 극복되지 못한다.
“포옹을 통해 ‘당신’을 볼 수는 없다. 포옹은 ‘나’와 ‘너’가 신체적으로 밀착되는 순간이고 그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는 일이다. 그 거리가 사라질 때, ‘너’를 볼 수 있는 ‘나’의 시야도 사라진다. 포옹의 세계에서 ‘나’는 ‘너’에 대한 시선을 확보하기 어렵다. 포옹을 통해 한없이 가까이 다가가지만, ‘사이’는 남는다. ‘나’와 ‘너’의 몸은 그 ‘사이’에서 교차할 뿐이다. 사랑을 통과하는 몸의 감각도 이 한없이 다가가는 교호의 느낌에 있다. 그것이 교차하는 사이인 이상, 둘 이상의 포옹은 완성되지 않는다. 한없이 껴안으면 영원히 가닿지 못한다.” (226-227)
사랑은 늘 가능성으로 도사리고 있다가, 시작되는 순간 불가능성으로 돌변해버린다. 불가능한 사랑이 지배하는 우리의 시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희망한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처연하며 위태롭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든 시시포스가 되어 불가능한 형벌을 떠안게 된다.
“연인의 몸을 스치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어떤 불가능한 기다림의 메타포다. 손가락은 한없이 연인의 몸을 어루만지지만, 영원히 그 몸으로부터 미끄러진다. 유리에 스며들 수 없는 물방울의 사소한 절망처럼.” (142)
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절망도 끝이 난다. 불가능성은 다시 가능성으로 돌아간다. 사랑은 기억의 빨치산이 되어 서서히 퇴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저기 텅 빈 미래에서 다시 우리를 기다린다.
“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다. (…)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하늘의 늙은 그림자 아래서 ‘당신’이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면, ‘나’도 한 숟가락의 밥을 뜨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다.” (237-238)
(불)가능한 사랑은 비극인가. 우리의 죽음을 일찍이 알 수 없듯, 우리의 사랑 또한 그렇다. 다만 우리는 다시 (불)가능한 사랑이 있는 그곳으로 이미 떠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