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2
“복사씨와 살구씨가 / 한번은 이렇게 /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어찌 인의예지의 네 알맹이가 마치 복사씨나 살구씨처럼 주렁주렁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 매달려 있는 것이겠는가?” (정약용, 『맹자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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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가리는 아몬드 향이 난다고 한다. 아몬드에는 아미그달린이라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아미그달린은 가수분해되면서 시안화수소를 생성한다. 시안화수소 수용액이 바로 청산, 청산가리의 바로 그 청산이다.
아미그달린은 복숭아씨와 살구씨에도 함유되어 있어서, 다량 섭취 시에는 위험하다고 한다. 아미그달린 자체에는 독성이 없지만, 소화효소와 만나 시안화수소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덜 익은 과일이나 과일의 씨앗을 다량 섭취하면 탈이 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복사씨와 살구씨를 각각 도인(桃仁)과 행인(杏仁)이라고 한다. 이때 인(仁)은 씨앗을 뜻한다. 유가의 그 인이 맞다. 그런데 뜬금없이 씨앗이라니. 여기서 만나 뵙게 되니 참으로 반갑고도 생소한 한자이신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 생뚱맞은 것도 아니다. 공맹의 도통을 이어받은 주희는 인의예지의 사덕을 인륜의 덕목에서 형이상학적 원리로 격상시킨다. 인(仁)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넘어, 만물을 쉼 없이 낳고 또 낳는[生生不息] 원리가 되었다. 주희에 따르면 ‘마음의 덕이자 사랑의 이치[心之德, 愛之理]’인 인은 모두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다. 복사씨나 살구씨처럼.
뭐, 여기서 고리타분한 성리학 타령을 하기에는 재미가 없을 테니 조금 감상적으로 가야겠다. 사랑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에 날 때부터 담겨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삶을 꿈꾸게 한다. 사랑과 평화, 자유와 행복 같은 것들이 그다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우리에게는 날 때부터 사랑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는데,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간다는 소리보다 그래도 조금은 든든하지 않은가. 어쩐지 우리의 마음을 잘 가꾸어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 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되고픈 의지가 극미량의 시안화수소만큼은 생길 것도 같다는 생각. 성리학도 이렇게 보면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이다. 물론 다량의 아미그달린을 복용하면 청산가리를 음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듯 성리학 또한 그런 것이다.
정약용은 못마땅했다. 어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리 따위가 무슨 사랑이냐고, 사랑을 하지도 않는 인간의 마음 도대체 어디에 사랑의 씨앗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냐고. 사랑을 해야 사랑이다. 씨앗[仁]은 우리에게 심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나무를 키우고 열매를 따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노력과 실천 없이는 사랑의 씨앗도 없는 것이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라는 김수영은 아마도 정약용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그의 말마따나 그는 사랑의 씨앗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을 거라는 “광신(狂信)”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니까.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며 우리를 독려하고 있으니까.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던 김수영은,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 의심”(이상 「사랑의 변주곡」)하며 복사씨를 눈이 푸르러지도록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지 않았을까. 아미그달린이 극미량의 청산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도 자라고 또 자라며 미량의 사랑과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극미량의 청산이라면, 꿈을 꾸는 것도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도인(桃仁)과 행인(杏仁)을 음독(音讀)하면 도인(道人)과 행인(行人)으로 들린다. 도인과 행인 모두 아미그달린이 함유된 씨앗인 것처럼, 도인과 행인 모두 사랑이 함유된 동등한 인간이라는 지극히 이상적인 유교적 결말로 마무리하기는 싫다. 다만, 도인을 꿈꾸든 행인을 꿈꾸든 청산가리 같은 사랑을 종종 음독(飮毒)하면서 언젠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을 공상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한 번쯤은 사랑의 꿈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탈이 나도 좋겠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