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0
하늘을 자주 본다. 굳이 의식해 본 적은 없지만, 애인이 그렇다고 한다. 정말 자주 본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자주 본다는 것을 의식해 본적이 없는 이유는, 하늘을 볼 때에는 오직 하늘을 볼 뿐이기 때문이리라. 하늘은 바라보면 다른 생각은 솟아나질 않고 오직 하늘만이 마음을 채우게 된다. 아니다. 마음을 채운다는 표현보다는 하늘이 마음이 된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나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다. 힘들고 지칠 때에는 하늘을 보기는커녕 힘들고 지친 내 자신 안으로 파고 들어가 아주 진창이 될 때까지 헤집다 나오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무릇 어떤 감정과 기분이 생생한 날에는 오히려 마음이란 것을 포착해 잡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는 어떤 감정과 기분들이 나를 잠식할 때에는, 마음이란 것이 너무나 크고 무거운 것이 되어 나는 마음이란 것을 생각할 수가 없게 되고, 오히려 마음이란 놈이 나를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를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땅을 보게 된다. 나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어쩌면 마음이 바라보는 내가 바로 나의 그림자가 아닐까.
내 마음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끄집어내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마음속에 나를 괴롭히는 그 무엇도 없음을 뜻한다. 그럴 때면 마음은 가볍고, 마음이 가벼우므로 나는 자꾸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속에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상태, 오직 잔잔하고 은은한 무구(無垢)의 기쁨만이 나의 바탕색이 되는 상태. 도화지의 기본 바탕이 투명이 아니라 흰색이듯, 마음 역시 기본 바탕은 공허가 아니다. 내 마음의 바탕색은 아마도 하늘색일 것이다. 가볍고 평화로운 무구(無垢)의 마음은 나로 하여금 자꾸만 머리 위의 하늘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늘을 볼 때, 하늘은 마음이 된다.
하늘의 채도가 높을수록, 그러니까 쨍하고 짙은 푸른색이 하늘의 바탕색이 되는 날에는 기분이 좋다. 그만큼 내 마음의 바탕 역시 쨍하고 짙은 기쁨인 것이므로. 구름의 모양이 다채로울수록, 그러니까 뭉실뭉실하고 탱글탱글한 구름이 무엇이라도 되려는 것처럼 하늘을 흘러가는 날에도 기분이 좋다. 그만큼 내 마음 속에는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미지와 문장들이 있다는 것이므로. 그런 날의 하늘을 바라보면 괜히 찰흙놀이를 하는 어린 창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러나 무거운 습기를 머금은 흐리고 탁한 구름이 하늘에 넓게 깔려 있는 날에는, 나 역시 무겁고 흐리고 어두운 마음을 갖게 된다.
내 애인은 일찍이 내가 날씨에 매우 예민하다는 것을 일러준 적이 있었다. 이것 역시 내가 굳이 의식해본 적이 없으나 애인을 통해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애인의 말마따나, 나는 하늘과 날씨의 상태에 따라 그날의 바탕색과 기분이 정해진다. 하늘이 우중충한 습기로 가득한 날에는 무엇이 구름이고 하늘인지 분간이 되질 않고, 바라볼 하늘이 없으므로, 그런 날엔 마음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가볍고 평화로운 날의 내가 하늘을 마음으로 여기듯, 무겁고 흐린 날의 마음은 온 세상을 나로 여긴다. 흐린 날엔 그림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그림자인 것이므로. 우중충하고 흐린 날, 내가 금방이라도 축축한 짜증을 이유 없이 쏟아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리라.
나는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엔 쨍하고 짙푸른 하늘을 매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맑다고 해서 반드시 내 마음이 가볍고 맑은 것은 아니겠지만, 나의 마음이 쉽게 무구해질 수 있음을 소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의 낮은 짧다. 따지자면 이것이 쉽게 무구해질 수 있음의 대가가 아닐는지.
해가 짧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맑고 푸른 하늘이 잦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마음에 관한 글을 쓸 수 있게 됨을 느낀다. 3개월이 넘도록 쓰지 못하던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글과 마음과 무구함에 대해 생각한다.
노을이 물든 보랏빛 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애인은 내가 하늘을 정말 자주 본다고 말했다. 나는 문득 무구해짐을 느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구한 마음 가운데 피어오르는 구름.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었고, 돌아와 글을 썼다. 흐리고 무거운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돌아올 계절을 맞이하는 무구한 기쁨. 쨍하고 짙푸른 바탕.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희디흰 구름. 그것을 만지고 노는 밤. 낮의 무구함은 밤의 무엇이 된다. 그런 계절을 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