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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화관제

210317

by 이건우

아침에 직장 동료가 아보카도를 가져와서 맛을 보았다. 맛이 별로였다. 그런데 맛이 없어서 놀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생각 혹은 기분을 잘 숨기지 못하는 데에서 놀랐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것을 느꼈다. 나는 생각보다 투명한 사람인 것 같다. 나의 기분이나 느낌, 감정이 잘 드러나는 편인 것 같다. 아니, 잘 드러난다기보다는 잘 숨기지 못하는 편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잘 숨기지 못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의 내면을 숨기는 것이 무척 인위적으로 보여 사실상 들통나고야 마는 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의 안쪽 세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벌써 시를 안 쓴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토록 훤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딱히 어찌 하지 못한다.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체 덮어두는 것이다. 늘 나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사실 나 스스로에게 들이미는 엄격한 잣대를 매번 한쪽으로 치워두게 된다. 아주 무서운 회초리라도 휘두르지 않으면 전혀 두렵지 않다. 흙바닥에 꽂아두면 그저 앙상하고 볼품없는 죽은 묘목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부러뜨리지 않고 두는 것. 회초리를 적어도 회초리일 수 있게 두는 것. 눈을 감고 있더라도 회초리가 회초리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가만히 두는 것. 그것만으로 나는 나의 안쪽 세계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다. 눈을 감되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 나의 안쪽 세계는 살아 있다. 나는 등화관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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