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20
푹푹이라는 귀여운 제목의 시를 썼다. 볕이 쨍쨍한 날이면 여름과 바다에 관한 것들을 쓰고 싶어진다. 3일 내내 바다 소리를 들으며 해변에 대한 시를 써서 그런지 문득 여름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오늘도 볕이 좋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여름을 좋아하게 된다. 바다는 변함없이 사랑스럽다.
어릴 적, 어린 티가 벗겨지기 시작한다고 믿(고 싶)던 시절, 가족들과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 남들이 모래성을 쌓고 있을 때 나는 혼자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바닷물에 녹은 모래성을 만지고 노는 것을 빼고는 모래성에 별 감흥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바닷물이 닿지 않는 무르고 축축한 모래밭에 앉아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덩이를 깊이 깊이 파다 보니 어느새 나의 덩치 만한 크기와 깊이의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고, 구덩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손끝이 다 까지도록 구덩이를 왜 그리 열심히 파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구덩이가 깊어질수록 그냥 기쁜 마음이 들었다. 순수한 유희에서 오는 무목적의 성취감 정도로 표현하면 될까.
몇 시간을 그리 팠을까, 구덩이의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아닌 자갈이 나오기 시작했고, 별안간 조금씩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모래 구덩이의 끝은 결국 바다였던 것일까. 거대한 구덩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웅덩이가 되었고, 더 이상 구덩이를 파낼 수 없게 된 나는 구덩이를 뒤로 하고 부모님을 따라 해수욕장을 나왔다.
여름과 바다는 이런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푹푹. 푹푹의 기억. 푹푹 찌는 여름과 발이 푹푹 빠지는 고운 모래밭과 다 까진 손끝으로 푹푹 파내던 구덩이. 구덩이의 깊음. 깊음의 기쁨. 깊은 기쁨. 내게 깊음이란 기쁨과 다름 아니어서, 푹푹 빠지는 깊음이 나를 푹푹 한숨 쉬게 만드는 늪과 다르지 않대도, 그저 기쁜 것이다.
그 푹푹의 기억으로부터 꽤 오래 건너온 지금, 온통 반짝임인 바다와 모래밭을 건너 나는 어떤 구덩이를 푹푹 파고 있는 것일까. 모래성은 여지없이 녹고, 구덩이는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모래성들과 구덩이들이었던 해변에서, 나는 나의 바다를 가진 적이 있었다. 깊고 기쁜 바다였다.
나는 아직도 구덩이를 파고 있고, 그것이 푹푹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