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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210709

by 이건우

애인과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가 공감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였으나 곧 우리의 주제는 ‘이 사회는 공감 능력을 강요하는가, 합리적 이성을 강요하는가’로 넘어가게 되었다. 후자의 입장에서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이야기하다가, 결국엔 우리의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인간다움’이라 함은 보통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 혹은 합리성이 곧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자 ‘인간성’으로 여겨지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수 천 년간 인류가 이룩해 온 찬란한 문명은 인간 이성의 위대함에 대한 찬탄이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지금이야 근대적 이성의 허구성이 폭로된 이후지만, 여전히 ‘인간다움’이란 곧 합리적 이성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성적 능력은 역설적으로 어쩌면 가장 동물적인 특성일지도 모른다. 합리적 이성은 인류가 지난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채택한, 최선의 생존 전략이자 진화의 산물이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인간 사회에서는 흔히 ‘동물적’이라고 여겨지는 삶의 방식 속에서 인간은 ‘합리적 이성’이라는 생존 전략을 찾아낸 것이다. 가장 인간다운 특성인 ‘합리적 이성’은 결국 인간이라는 종이 채택한 가장 ‘동물적’인 능력이 아닐까. ‘동물성’이 인간의 방식으로 극단화된 모습이 어쩌면 ‘이성’이 아닐까. 인류의 잔혹성은 보통 이성의 탈을 쓰고 찾아 오곤 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으며 지금도 어디선가는 분명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다움’을 다르게 읽는다. 왜 ‘인간다움’은 인간만이 지니는 고유한 특성이어야만 하는가?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특성 가운데서도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또한 정서적 존재이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교류하고 교감하며 연대할 수 있다. 감정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니지만, ‘인간다움’이 될 수 있다. 진화론적 견지에서 보자면, 우리 인간은 혼자일 때 한없이 약하지만 함께일 때 한없이 강하다. 그리고 함께이기 위해선, 연대하기 위해선 감정의 교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의 인간다움이 감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론 합리적 이성이 정답을 내려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정답’이라는 게 도무지 있기라도 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 그래서 함께 분노하고 슬퍼해줄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인간다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우리의 ‘인간성’은 객관적인 이성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감정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의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동물들과 교감하고 그들을 배려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만 의미 있는 경구가 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찾는 것만이 인간성에 대한 경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간다움은, 우리의 위대한 인간성은, 서로 교감하고 배려하며 연대하는 데에 있다. 인간은 ‘함께 있음’이며, 이는 이성보다는 감정에 가깝게 기울어 있다. 그러니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울고, 더 크게 분노하자. 이 얼마나 ‘인간적인’ 모습인가! 인간만이 가진다고 여겨지는 행복, 윤리 따위의 것들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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