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걸치고 휘적휘적 밖으로 나와 곧장 사무실로 향한다. 아무리 빙빙 길을 돌아 배회해도 30분이면 족히 도착하는 거리다. 따뜻한 음료를 옆에 두고는 곧장 글을 쓰기 시작한다. 눈을 뜨고 30분도 채 안 된 아침에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로 글쓰기다. 그만큼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급한 일이다. 무려 삼십 년이나 하지 못하고 미뤄온 일이니까.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다닥다닥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희한하게도 몇 시간 뒤 원고 한 편이 완성된다. 그러고 나면 일단은 한숨이 놓인다.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이 끝났으니 이후로는 아무리 대충 살아도 오늘은 이미 괜찮은 하루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원고를 정리하고는 어제 들어온 주문을 확인하고 출고를 시키면 얼추 점심때가 되어간다. 이로써 오전 업무가 끝났다.
점심을 먹고 나면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지 않고 연습실로 향한다. 낮의 햇살을 받으며 연습실로 가는 길을 걷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괜스레 같이 산책길을 같이 걸어가는 동네 강아지들에게도 미소를 건네고 어제와는 다르게 자라 버린 풀과 나무들한테도 눈인사를 건넨다. 머리와 어깨 위로 쏟아지는 따끈따끈한 햇살 마사지를 받으면 어느새 내 마음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추측컨대 회장님이나 품을 것 같은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기분 좋은 산책 30분과 한낮의 태양으로 오늘의 행복지수를 백 퍼센트를 채운 후에는 첼로 연습실로 가서 세상 호사스러운 취미 생활을 한다. 오늘은 어제 하지 못했던 4개의 화음을 깔끔하게 연주하는데 목표를 둔다.
취미생활을 마치고 오후에 사무실에 복귀하면 그제야 생업의 노동 시간이 시작된다. 대개 세시나 네 시부터 시작해 쉬는 시간 없이 아홉 시나 열 시쯤까지 일을 한다. 하루의 생업 노동 시간이 짧은 건 토요일 풀타임 근무로 채운다. 어차피 주말에도 별달리 할 일은 없으니 평일의 시간을 원하는 것들로 채워 보내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렇게 하루를 보낸 지 6개월 정도 흘렀다. 그리고 정말로 놀랍게도, 이렇게 하루를 보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아무런 큰 일 따위는 나지 않았다.
일과 결혼, 그리고 생활의 모든 것이 소위 정상적인 범위에서 벗어나 바닥에 있을 때, 당연하게 나도 이 모든 것과 함께 바닥에 납작 찌부러져 있었다. 워낙 세게 펀치를 맞은 탓도 있겠지만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일어나 이 사회에 서려면 일과 결혼, 생활이 모두 정상범위로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더 노력을 했다. 일하는 시간을 더 늘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결혼을 위해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빚을 갚기 위해 잔돈까지 집착하며 돈돈돈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인생은 더욱더 심하게 찌부러져갔다. 심지어 자존감마저 구겨지는 시점이 지나자, 말투도 행동, 성격마저 더럽고 못생기게 구겨져 갔다. 나를 둘러싸는 모든 것과 심지어 나 스스로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나는 한순간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인생의 시간표, 하루의 시간표가 멈추는 순간이었다.
곰곰이 내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간 하고 싶었는데 돈과 시간에 밀려하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냈다. 기왕 망한 인생이라면 나머지 인생과 하루하루는 하고 싶은 것들이라도 해보자 싶었다. 나는 방바닥에 누워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을 추려보니 글쓰기, 낮에 햇빛 보면서 산책하기, 첼로 연습, 30분 동안 밥 먹기, 하루 8시간 잠자기 등이 나왔다. 대단한 것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나는 의외로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다음 이 위시리스트를 바로 하루 시간표에 적용해 보았다. 대부분 시간을 쓰면 되는 것들이라 어렵지 않았고 돈이 좀 들어가는 첼로 학원비는 그때그때 가방도 팔고 옷도 팔아 충당했다.
그러자 단순히 우선순위를 바꾸고 시간의 배치를 달리 한 것에 불과했는데 놀랍게도 삶의 만족도는 매우 달라졌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뒤집은 것 같이 내 하루는 거꾸로 갔다. 처음에는 생판 낮에 돌아다는 것이 좀 창피하기도 했고 일할 시간에 연습실에 있는 것이 왠지 마음에 찔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조금씩 마음속에 쳐 놓았던 담장을 허물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찌그러졌던 마음도 조금씩 펴졌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구겨져 납작했던 내 모습도 점점 평평하게 펴졌다. 말투와 행동 그리고 집나 갔던 웃음이 입가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꾸로 하루 사용법은 곤두박질쳤던 나를 거꾸로 일으킨 효과 직방의 치료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