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내어진 행복

by 아가줌마

온통 실패의 슬픔에 푹 빠져있을 때 드는 감정은 불안도 분노도 아닌 억울한 감정이었다. 목표에 매진하느라 일상의 즐거움을 참아온 것,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감정이 올라와도 감정 따위에 휩쓸릴 시간도 여유도 없다며 무시한 것, 아버지의 병상에서도 마감을 하느라 곧 돌아가실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는 대신 원고에 코를 박은 것.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더 후퇴했음을 알았을 때, 오래 참고 있던 내 삶의 나사가 한순간 스르륵 빠져버렸다.

억울한 감정은 어떻게 해도 답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억울한 인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일이 종말이라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을 인생의 단맛은커녕 인생 곳곳에 숨어있는 꿀맛도 모른 채 입맛만 다신 채 그냥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단맛이야 인생이 주는 선물이라고 치더라도 어떻게든 꿀맛이라도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호미를 하나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하루에 단 하나가 될 지언정 꿀맛, 아니면 그 비슷한 맛인 것 같은 뭐든지 캐내기로 결심했다.

호미를 든 채 하루를 보내보았다.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전문점을 지나면서 이제는 커피값도 아껴야 하니 그냥 지나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호미가 옷 속으로 깊게 들어갔다. 담배 냄새가 가득한 입구를 통과해 사무실에 올라갈 때 얼른 이 곳을 탈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내 신세가 생각나 호미를 어루만지던 손이 얼어붙었다. 오전 일을 마치고 단촐한 점심을 엄마와 먹으면서 예전에 혼자 살 때 밀키트와 샐러드 배달로 원하는 식단을 하던 걸 생각했다. 나는 더 두툼해진 뱃살을 잡는 바람에 호미를 슬쩍 손에서 놓아버렸다. 밤이면 작디작은 엄마의 문간방에 누워 과거 나의 집을 그리워한다. 호미는 어느 새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캐내지 못한 채 눈물 자국을 한 채 잠이 들었다.

그렇게 호미를 매일같이 들고 다녔지만 나는 일년간 아무것도 캐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자니 호미가 좀 무색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눈에 보이는 걸 다 캐보기로 했다. 일단 무엇이든지 캐낸 다음에 꿀맛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는지 살펴보는 걸로 말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된 매일매일. 하루는 습관처럼 지나던 커피전문점을 지나 그 옆 편의점에 들러 이번 주 먹을 간식 한 개를 골랐다. 소포장된 간식을 매일 한 개씩 아껴가며 꼭 먹고 싶을 때마다 먹었다. 덕분에 아껴먹은 간식은 너무나 달았다. 꿀맛 하나를 처음 캐냈다.


하루는 담배 냄새가 가득한 사무실을 올라가 일을 시작하려는데 작은 창문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조용한 아침의 평온한 시간, 따뜻한 사무실에서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자유, 창문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의 쏟아지는 입자 하나하나가 이 시간을 축복하고 있었다. 나는 작은 사무실에서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일어나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들고 천천히 빙글빙글 돌았다. 이 곳에서 처음 느낀 꿀맛이었다.

오전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단촐한 점심을 먹으면서 엄마와 이야기를 한다. 엄마의 쪼글쪼글해진 얼굴을 보면서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더 엄마와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된 후로는 엄마와 단 둘이 제대로 밥을 먹을 일이 없었다. 이제야 나와 엄마는 딸과 엄마로서의 온전한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든 딸과 더 나이가 든 엄마의 관계는 딸과 엄마의 관계에서 여자와 여자의 관계로 변한다. 나는 이제야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닌 한 여자 사람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밥을 오래 씹다보니 단맛이 올라온다. 호미가 어느 새 주머니 앞쪽으로 나와 있다.


밤에 나는 엄마의 문간방에서 누워있다. 엄마의 방에서는 TV소리가 새어나온다. 이 집 주인은 좀 귀찮게 하고 시끄럽지만 다행스럽게도 월세를 내라고 우악을 떨지 않는다. 매달 내야할 돈이 쫓아다니지 않아 잠시 쉴 수 있는 이 작은 방이 반공호 같기도 하다. 불안에 떨던 심장 박동이 마침내 고요해지고 달콤한 밤이 마침내 찾아왔다. 다행스럽게도 꿀맛 같은 행복은 내 호주머니 속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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