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그 당시엔 대체 왜 그랬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왜 그렇게 힘이 들었는지, 왜 그렇게 슬펐는지, 왜 그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를 모르겠는데 기억이 나는 건 오직 그 당시 온통 나를 뒤덮고 있던 슬픔의 농도와 질감 뿐.
마치 내 주변 반경 60센티미터에 마치 동그랗고 투명한 막이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주위는 배경도 바뀌고 시간도 흘러가고 색채도 달라지지만 내가 들어있는 투명 막 안에는 온통 비가 내렸다. 비를 피할 곳도 없어 온통 비를 후드려 맞느라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비가 잠시 멈출 때도 있었는데, 그 때 비로소 숨을 좀 쉬고 밖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 해도 몸은 이미 켜켜이 바닥부터 쌓인 슬픔에 잠겨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빠져 나가려고 쌓여있는 슬픔을 한 장씩 걷어내 꽉 비틀어 짜보았지만 그 물은 다시금 내게로 떨어졌다. 어떻게 해도 나는 나를 말릴 수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과 기분 전환 겸 나간 외출로 인해 살짝 즐거움이 피어나오나 싶으면 즉시 슬픔이 팔을 뻗어 기어코 자신의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화창한 날씨와 알록달록한 음식은 즉시 흐리 멍텅해졌고 눅눅해졌다. 심지어는 물을 많이 먹은 날에는 누군가의 아무 뜻 없는 한 마디에 마음이 심하게 뒤집히고 누군가의 행복한 일상이 부러움을 넘어 미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까지 유발했다. 한 번 분노가 일기 시작하자 나는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이 생겼다. 길을 가다가 내 앞을 막는 행인에게, SNS에서 행복해 보이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침대 모서리, 갑자기 내린 비 등. 이렇게 여기저기서 유발된 분노는 점점 폭풍 같은 쓰나미로 변해갔다. 그리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분노의 쓰나미는 마침내 방향을 틀어 나의 가장 깊은 곳을 때렸다. 쓰나미는 이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뿐이었다. 나는 방향을 바꾸지 않기로 결심하고 오직 내 안에서 쓰나미가 점점 작게되어 영원히 소멸되길 바랐다. 그렇게 꼬박 1년 동안 나는 쓰나미를 내 안에 넣고 품고 지냈다.
쓰나미를 품고 사는 동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물이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 매일 쓰나미를 들여다 봐야했다. 슬픔의 물이 늘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슬픈 영화나 음악은 무조건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했다. 슬픔이 생기면 슬픔을 배출하라고 했던가. 하지만 내 경우, 슬픔이 한도를 초과하게 되면 그 슬픔은 사람을 삼켜버린다. 하마터면 나도 그 녀석에게 삼켜 먹혔을 뻔 했다. 나는 간신히 그 입구에서 벌벌 떨면서 안간힘을 썼다. 너무나 슬펐고 슬프지만 슬픔에게 나를 내주면 더 슬플 것 같았다. 인생이, 나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는게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그래서 어느 날, 슬픔의 물티슈 속에서 물티슈를 한 장씩 짜내보았다. 몸에 떨어진 물을 말리면서 이게 무슨 슬픔의 물이었는지를 들여다보았다. 물티슈는 너무나 많이 층층이 쌓여 있어서 몇 장을 더 말려야 하는지 아득했지만 그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딱 내 말 밑에 있는 그 물티슈 한 장만 집어 들어 매일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삼백육십오일이 지나자 드디어 바닥이 느껴졌다. 더 이상의 물티슈는 남아있지 않았다.
물티슈 통 밖으로 나와 본다. 거대하게 느껴졌던 물티슈 통은 내용물이 없어져 꼴사납게 폭삭 사그라들었다. 밖에는 그동안 건져올린 물티슈들이 쌓여있다. 산더미 같은 물티슈에도, 통 안에도 물은 멀끔하게 말라있다. 나는 말라버린 물티슈들을 바라보다가 이게 한 때는 엄청나게 축축했던 물티슈였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그리고 말라버린 내 슬픔을 바라본다. 한 때는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고 슬펐는데 지금은 왜인지 매우 민망하다. 나의 슬픔과 원망, 분노의 쓰나미는 도대체 언제, 어디로 갔을까? 그나저나 애사당초 쓰나미가 생길 일이긴 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슬펐던 것일까? 어쨌든가 슬픔은 아팠던 기억을 남겼지만 다행히도 상처는 남기지 않았다.
물이 말라버린 물티슈 속 슬픔은 물티슈 통과 함께 버리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