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빼꼼히 머리를 내밀어 문을 열고 밖을 확인해 본다. 여전히 밖에는 아무도 없다. 몰래 놓인 꽃다발이나 작은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자 괜스레 입맛만 다시고 문을 닫는다. ‘벌써 왔다 간 걸까?’, ‘언제쯤 오는 걸까? 온다면 온다고 말이라도 좀 해주면 좋으련만.’ 긴장을 놓지 않고 삼십분을 더 조용히 기다려 본 후 나는 신경질적으로 분홍 립스틱을 벅벅 지웠다.
이렇게 기다린 지 실은 오래 되었다. 처음에는 설레는 마음에 매번 가장 예쁜 옷을 입고 머리를 둥글게 말고 정성스런 화장을 하곤 했다. 하지만 한 달 두 달이 한 해 두 해가 되고 십년, 이십년이 지나 수십 년이 되자 화려한 원피스는 편한 검정 바지로, 둥글게 말아 넣은 머리는 싹뚝 잘려버렸다. 수십 개의 화장품은 멀티형 크림 1개로 정리되고 1시간 걸리던 화장은 눈썹과 립스틱을 쓱쓱 바르는 걸로 놀랍도록 타협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그에게 내어 줄 수 있는 건 세월에 닳아버린 뭉툭한 아줌마의 모습이라 조금은 창피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음에는 립스틱 색이라도 조금 더 환한 걸로 바꿔 발라야겠다. 그럼 잠시라도 내가 쨍하게 보일지 모르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아마도 그도 색이 많이 빠지고 무채색에 조금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어렵게 만났는데 한쪽이 색이 너무 튄다면 서로 못 알아보거나 서로 어울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기왕이면 보기 좋게 색이 좀 빠진 상태이길, 내가 원하는 나에게 딱 맞는 같은 채도의 당신이길 바래본다. 하지만 당신이 오기도 전에 김이 빠져 버리면 안 되니 나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해줘야겠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그 억겁 같던 시간을 보내었는지 말이다.
나는 세상이 무서운 작은 여자애였다. 거대한 세상에 미리 주눅이 들어 부딪치기도 전에 미리 기권표를 들고 입장하는, 싸울 의지 자체가 아예 없었던, 그래서 날 이끌어줄 남편을 만나길 소망하던 이십대였다. 하지만 그 때 나를 한 발 세상 앞으로 가게 해 준 것은 남편이 아니라 공부였다. 그렇게 삼십대가 되자 조금은 세상이 무서워지지 않게 되고 스스로 한 발 더 나아가보고 싶었다. 나는 한 손엔 공부와 한 손엔 일을 잡고 삼십대에 세상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쳤다. 이렇게 헤엄치다 보면 잠시 머문 섬이나 물살이 세지 않은 바다에서 당신을 기적처럼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는 헤엄치느라 숨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래도 당신을 찾기 위한 분주한 눈빛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바다 어느 곳에도 없었고 어느덧 사십대에 접어든 나는 드디어 나만의 섬을 찾았다. 나는 그 섬을 정성들여 예쁘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정작 당신은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흐르고, 바닷물에 섬은 잠식되었고 나는 또 바다에 홀로 남았다.
당신을 기다리면서 솔직히 당신을 원망한 적이 많았다. 거친 바다의 풍랑을 맞으며 온 몸에 퍼렇게 멍이 들 때마다 이렇게 허우적대는 나를 좀 꺼내주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내 구겨져버린 인생을 당신이 좀 깨끗하게 펴서 잘 말려주길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했던지. 너무나 애타게 한 당신을 끝내 만나게 된다면 먼저 귓방망이를 날려야겠다고 다짐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닳아버렸다. 풍랑과 수많은 시간의 모래알에 몸과 마음들이 체에 걸러지듯 찌꺼기가 걸러지고 꼭 필요한 마음만 남았다. 이제 당신이 가져다 쓸 건 진짜만 남은 내 마음. 이 마음을 들여다보면 미움과 원망 대신 고마움과 설레임 그리고 한가득 사랑이 있다.
이제는 당신에게 아무런 기대나 원망이 없다. 나는 그저 당신이 있는지가 궁금하다. 나는 원래의 색에서 색이 많이 빠지고 거의 눈에 띄지 않아 세상 속에 조용히 박혀 있는데도 당신이 이런 나를 알아볼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당신이 나를 발견하고 당신과 눈이 마주친다면 나는 아마도 기쁨과 설레임에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밥 잘 먹고 좋은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어느 날, 당신의 따뜻한 눈빛이 내 삶의 한 지점에 닿는다면, 그렇게 우리의 러브스토리 첫 페이지가 시작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