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크리스마스

by 아가줌마

반평생을 살아왔건만, 열 살 이후로 산타는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지만 아직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때면 설레는 감정을 숨길 수 없다. 12월 달력을 넘기면서, 아직 이른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서, 길거리에서 신나는 캐럴이 흘러나오면 미처 잡을 틈도 없이 마음은 이미 홀랑 넘어가 있다. 이런 마음을 볼 때면 매년 실패할 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으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크리스마스 전날부터 시작해서 연말까지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전에 경고를 하고 크리스마스 약속을 만들어 마음을 속여 봐도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서운한 마음은 울먹울먹 하다가 기어이 터지고 만다.

작년에도 분명히 기억난다. 크리스마스 전날이 되자 마음은 이미 울상이었다. 누가 봐도 티가 나는 그야말로 울기 직전의 울상을 하고서 툴툴거렸다. 일도 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듯 자꾸만 시계만 쳐다보고 묻는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심지어 까다롭게 고르는 점심 메뉴를 정할 때에도 전혀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슨 일 있어? 괜찮아?”하고 물어보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가락만 까딱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나는 심각성을 느끼고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마음이 좋아하는 차와 간식도 준비해 주고 잔잔한 음악도 틀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해 케이크를 선물로 손에 들려 퇴근 시간보다 일찍 보내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올해는 뭔가 좀 다르다. 크리스마스 전날이 되자 불편해하는 건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마음은 어찌 된 건지 괜찮아 보였다. 그러니까 평소와 같았다는 말이다. 나는 긴장을 놓지 않고 끝까지 마음을 관찰했다. 마음은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심지어 웃기까지 했고 퇴근 시간이 되자 평소같이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을 했다. 마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원인에 대한 호기심은 문득 기분 좋은 홀가분함으로 바뀌었다. 크리스마스 전 날 기분이 좋았던 게 얼마 만인가.

한 편, 퇴근한 마음은 조용히 저녁 루틴을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쉬는 날이지만 평소처럼 출근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그간 쌓아두었던 일들, 일을 할 때 필요 했지만 시간이 없어 미처 하지 못했던 공부를 해볼 심산이다. 한 번도 크리스마스에 자발적으로 출근해 본 적은 없었다. 너무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전날 먹던 케이크를 세끼 밥처럼 퍼먹으며 각종 영화와 밀린 드라마를 머리 깨지도록 보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는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 좋은데 살은 쪄버린 탓에 엉망인 기분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사람이 없다는 것, 연인을 만들지 못하는 한심스러운 자신의 탓, 인생 탓, 조상 탓이라 생각했다. 썩은 운명에 대한 분노는 주변의 사람들,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에서 두둥실 피어오르기 시작해 크림이 풍성한 케이크, 치킨 피자를 넷플릭스와 마구 섞어 이상한 조화를 이루더니 이내 물건을 싹 버리든가 아니면 싹 다 다시 사는 극단적 쇼핑과 당근 사이에서 기막힌 절정에 이르렀다. 크리스마스는 늘 이런 패턴으로 마음을 가지고 실컷 놀다가 새해가 한 참 지나서야 비로소 싫증난 듯 슬쩍 가버리곤 했다.

그런데 SNS를 끊어서일까. 연락할 길 없는 크리스마스는 올해는 이상하게도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화이트데이, 밸런타인데이 짝꿍들과 빼빼로데이 녀석도 올해엔 보질 못했다. 매년 그렇게 나랑 친한 척하더니 내가 연락을 하지 않으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이들도 알만은 하다. 12월 초에는 크리스마스 생각이 났지만 정작 그즈음엔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잊어버렸다. 같이 쌓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크리스마스가 알면 크게 서운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알고 보면 12월은 또 얼마나 바쁜 달인가. 더군다나 며칠 전 찾아온 생일 손님을 잠깐 맞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종일을 누워있지 않았나. 뻔히 이런 사정을 알면 크리스마스도 이제는 좀 눈치를 챙겼으면 하는데 영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내일은 평소같이 출근해서 크리스마스에게 슬쩍 눈치를 주려고 한다. 하지만 갑자기 변한 태도에 너무 삐져 버리면 안 되니 저녁엔 작은 케이크를 먹고 캐럴을 함께 들으며 살짝 위로도 해주려 한다. 너무 늦어버린 어른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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