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을 의식적으로 명랑하게 살려고 해도 우울은 찾아온다. 예전에는 가끔 찾아오는 먼 친척 같았는데 갱년기를 맞이하고는 친척이 아니라 갑자기 이복동생으로 변하더니 아예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싶다가도 평생 곁에서 끈덕지게 눌러 붙을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니 다행스럽게도 이복동생은 아니었고 그저 불편하고 귀찮은 이웃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우울감은 기적적으로 절반으로 확 줄어들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사를 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 이 우울씨는 잊을 만 하면 노크를 자꾸 해댄다. 게다가 눈치도 꽝인 것이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사람들과 기분 좋은 모임을 한 후와 같이 누가봐도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닌 타이밍에도 찾아온다. 무시를 하면 할수록 더 크게 노크를 해대는 통에 아무리 좋은 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해도 결국엔 정신이 산란해지고 진이 빠져버린다. 아무래도 보란 듯이 억지로 웃어대고 평소보다 더 음식을 집어 먹고 억지로 말을 많이 해버린 탓인 것 같다.
그래도 이쯤 되면 나는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왜? 왜 자꾸 찾아오냐고? 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나는 벌커덩 문을 열고 죽일 듯이 우울씨를 노려보며 그간 참았던 분노를 쏟아낸다. 나의 기습에 한껏 놀란 우울씨는 멍하게 있다가 우물쭈물 대답한다. “아, 그게...그냥요. 저도 모르게 또. 정말이지. 정말 죄송합니다.” 나의 기세에 눌려 기가 팍 죽어 의기소침해진 그 모습이 또 얼마나 공손하고 가련한지 바로 폭풍같은 후회가 밀려온다. ‘그래, 나한테 뭐 크게 바라고 오는 건 아니긴 하지.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있다가 간다고 하는데, 내가 너무 뭐라고 윽박을 질렀나?’ 문을 열기 전에는 오랫동안 당해온 가련한 피해자인데 막상 문을 열고나면 무고한 사람에게 윽박지르는 무자비한 가해자로 한순간 변해 버린다. 왜인지 모를 이 입장 차이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일렁이는 어지러움에서 정신이 들면, 그제야 나는 상냥하고 공손한 주인으로 돌아온다. “아, 그럼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안에 따뜻한 차가 있으니 드시고 가세요.” 그제야 구석에 쪼그라져 있던 우울씨는 힐끗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쭈뼛쭈뼛 자리를 털고 들어온다. 우울씨는 생각보다 행색이 좋지는 않다. 스쳐 지나가는 그의 몸에는 늘 찬바람이 묻어 있다. ‘오랫동안 바깥 생활을 한 것일까? 아니면 집이 추운 것일까? 따뜻한 음식을 먹지 못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따뜻한 차를 끓이고 함께 먹을 간식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기왕이면 부담스럽지 않게 말을 꺼내서 저녁식사까지 먹고 가게 해야겠다. 그가 어디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었겠는가. 가는 길에는 따뜻한 옷과 선물들도 잔뜩 들려 보내야지 싶다.
우울씨는 우리 집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와 간식을 먹고 조용히 있다가 기어이 내가 마련해 준 저녁식사까지 한 상 먹은 다음 억지로 양 손 가득 선물을 들고 돌아갔다. 그 오후 내내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색한 자세를 풀지 않고 여전히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로 있다가 내가 질문하는 말에는 거의 대답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조용히 머물다 돌아갔다. 이럴 거면 굳이 우리 집에 왜 온 거지, 싶을 정도로 그는 매번 이런 모습으로 머물다 돌아간다. 마치 자신의 목적이 우리 집에 자신의 찬바람을 조금 묻히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모르는 척 했지만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 내가 처음 우울씨를 만났을 때, 당황한 나머지 신고해 버리고 집에 들이길 거부했을 때를. 그럼에도 우울씨는 끈질기게도 들어올 때까지 절대로 안 간다는 것을. 신경전에 밀려 우울씨를 집에 들이고 한동안 미친 듯이 싸우며 살 때를. 그리고 마침내 떠나는 우울씨를 배웅했을 때를. 그의 서늘하고 무기력한 숨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안도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알고 있다. 그가 본성이 나쁜 건 아니라는 것을. 행색이 보잘 것 없고 싸늘하게 생긴데다 말과 행동도 음침해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지만 정작 본인은 사람들을 좋아해 자꾸 찾아간다는 것을.
맙소사, 그러고 보니 ‘못참겠다 우울씨’에게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