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때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아줌마들이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아저씨들이 들뜬 눈으로 나에게 추파를 던질 때, 질색팔색을 하며 속으로 다짐을 하곤 했다.
‘나는 저 나이 때에는 저러지 말아야지.’
시간은 꼬박꼬박 흘러 드디어 내가 그 때 그 중년의 나이가 되어 버렸다. 하루는 어떤 일 관련 행사를 하는데, 그 담당자 남자분이 매우 친절했다. 특히나 내가 입은 옷을 보고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나는 속으로 ‘오늘 내 코디가 통했군.’ 싶었다. 혹시나 그 담당자 남자분이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내심 기대하면서 다가간 순간, 그 남자분이 말했다.
“오늘 참 고우세요.”
‘잉? 곱다고? 뭐지 이 극존칭은?’
나는 일부러 덤덤하게 고맙다고 말한 뒤 돌아섰지만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담당자 분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 고작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의 그 분이 보기에 사십대 후반의 내가 얼마나 어르신으로 보였겠는가. 물론 이 어르신의 눈에서 볼 때는 너나 나나 큰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다만.
일전에 친구가 충격적이라며 들려준 말이 생각난다. 하루는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친구에게 묻더란다. 선생님도 혹시 떡볶이를 드시냐고. 친구와 나는 그 날 떡볶이를 먹으면서 왜 학생이 그런 질문을 했을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떡볶이 같은 아이들 간식은 못 드실 것 같은 대왕 어르신’이었던 것이다. 이 김에 밝혀 두자면, 대왕 어르신인 우리도, 대왕 어르신의 어머니인 우리 엄마도 떡볶이를 아주 잘 드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요즘에 내가 느끼는 의미는 이렇다. 나이가 들면 외모가 쭈글해지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게 급속도로 떨어지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마음은 겉모습보다 아주 천천히 늙어간다. 우리가 종종 마주치는 이런 불편한 감정은 바로 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아직 마음이 10대 인지라 귀여운 그림이나 캐릭터가 좋지만 그런 용품을 드러내놓고 하기에는 슬슬 눈치가 보인다. 오죽하면 인터넷 게시판에 ‘나이 40넘은 사람은 인간적으로 캐릭터 인형 키링을 달지 말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열띤 공방이 오고가겠는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원하는 걸 드러내는데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것이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십대 때 보았던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중년의 아줌마는 나보다 훨씬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에라도 그 때 째려보았던 마음을 사과드린다.
그러니 알아두자. 누군가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 같다면 그 사람도 겉과 속의 싱크가 맞지 않아서 생활 속에서 꽤나 부딪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반대로, 누군가 겉과 속의 싱크가 아주 맞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실은 그 사람도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나의 경우를 물어본다면, 나는 호감이 가는 사람이 베푼 친절에 가슴이 막 설레지만 그래도 애써 꾹꾹 참는 편이다. 왜냐면 이건 거울을 한 번 쓱 보고 나면 즉각 교정 치료가 되곤 하는데,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사람은 나 말고 내 지갑에만 볼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나는 혼자만의 설레발에 속아 헛웃음이 나오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마음은 잃고 싶지 않다.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라니, 아직도 젊은 그 마음이 너무 귀엽지 않은가. 자칫 방심해서 흘러나오지만 않으면 내 안에서 핑크빛이 퍼지건 오색찬란 무지개가 빵빵 뜨건 무슨 상관인가. 그러다가 거울을 보게되면 즉시쓴 맛이 팍 올라오는데, 이 팍, 하고 터지는 달고 쓴 맛의 중간 어디쯤 되는 맛이란 바로 이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이 '애들은 가라'의 맛을 모른다면 한 번 경험해 보시길, 강추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