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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KTUS Jul 01. 2015

불꽃놀이

부디 자유로워라 당신, 그리고 사랑의 불꽃을 피워라.


얼마 전 볕이 좋은 봄날에, 중학교 친구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학교 동창들은 그 친구의 임신 소식부터 줄곧 그 아기를 봄아기라 부르곤 하였다. 나의 아이도 아닌데 어쩐지 친구의 봄아기는 특별하다. 아기의 탄생이 꼭 나의 탄생이나 만큼 소중하고 벅차다. 눈을 감고 이제 막 꼬물거리며 태어난 아기가 살아갈 긴 경주를 생각해 본다.


이 아기는 봄에 태어났으니 한 해마다 아기의 내부에 봄이 쌓이고, 또 새로운 봄이 찾아올 것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그 사람의 내부에 쌓이는 시간의 흔적은 퇴적암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각기 다른 이유와 물질로 자취를 남기곤 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일생은 수많은 출발점을 가진 각기 다른 자신으로 채워지며, 마음속에 가지를 친 수많은 여러 개의 자신은 다른 길이와 모양으로 살다가 하나의 점에서 만나 삶을 종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지마다 다른 싹이 돋고 이파리가 무성해지는 자신들이 탄생하는 순간은 마치 불꽃놀이와 같다. 열점을 가진 환희의 폭발인 셈인 것이다.


누구의 말마따나 지상에 발붙이고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열점을 가진 폭발이 아니라면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기뻐하고 축하할 것인가.


나는 스물 네 번의 봄을 지나 스물다섯 번째 봄을 맞이했다. 어쩐지 이 봄은 지난 봄과는 다르게 특별하다. 불꽃놀이의 환희처럼 진정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순간을 겪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나의 바람은 이토록 구멍이 많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이었다. 이 봄을 겪기 전엔 적어도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길 수 없었다.

몇 해 전 군대에 갔을 때 유일하게 혼자일 수 있는 공간인 화장실 변기에서 산울림 김창완 아저씨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본 적이 있다. 김창완 아저씨는 말했다.
“이렇게 괜찮지 않은 나도 사랑한다.”고.
그 때 그 작은 자유의 공간에서 나의 내부가 환하게 밝혀지던 순간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늘 괜찮지 않은 사람이었고, 나를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던 탓일까. 그 말은 낮달처럼 내 마음 속에 떠서 얼마간 나를 지켜주었다.


 후에,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할 때 입버릇처럼 아저씨의 말을 섞어 건네곤 했다.
“괜찮지 않은 너도 사랑하라.”고.

당시의 그 말들의 방향은 모두 진심을 향했지만 허사였음을 안다. 나는 불행한 유년을 보냈다. 또래의 나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오랜 시간 성폭행을 당했다. 어릴 적, 또래가 내게 남긴 상처는 지독했다. 마음을 닫고 입을 닫고 십대를 보냈다. 나는 십대를 통과하는 동안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 갖지 못했다. 십대 이후에도 후유증은 지속되었다. 불과 그것이 얼마 전까지 유효한 일이다. 나는 유년의 불행으로 나를 소중히 여긴 적이 없다. 늘 결핍에 살았으며, 친구를 갈망했다. 그러나 갈망은 늘 현실에 가로막혔다. 친구를 사귀지 못했던 나의 현재와 미래는 긴 터널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나의 내부의 사랑의 존재를 의심한 적도 있다. 내게 사랑이 부재한 것이 나의 결핍의 연원이라면 내 인생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삶에 열성이었고, 나를 구성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고 믿으며 상처의 허물을 벗고 기억에서 해방되려고 애썼다.


일 방향이 아니라 타인과 사랑을 통하는 일, 그 일이 내 인생의 유일한 의제였다.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내부와 불화하고 있었고 어느 날은 행복에 겨워 내게 되물어도, 나는 여전히 잘 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리석게 사랑을 놓쳤고, 바보 같이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이별을 통보 받기 일쑤였다. 거리마다 사랑이 북적이고 나무마다 꽃들이 구애할 때에도 나는 늘 공허에 시달렸으며,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없이 사랑은 나를 떠나갔다. 또한 여전히 타인을 내부에 들여놓는 일에도 서툴렀고 그럴 때마다 유령처럼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유년의 기억을 탓하며 홀로 움츠려 있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긴 시간 나를 위해 울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내게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런 거짓과 위장이 없어도 되는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는 봄날이었다. 오후에 간단히 처리할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일정도 없는 날이기도 했다. 그날은 유독 아침부터 공기가 포근했다. 나는 부드럽게 샤워를 마치고, 마음에 드는 초록의 옷을 골라 입었다. 집으로 나서는 길에 어디에선가 기분 좋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나는 서서히 과거로부터 해방되고 있었다. 친구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웃고 최근에 내게 생긴 항공사 지상직이라는 꿈을 이야기하며 점심을 먹었다. 봄바람마다 음표를 달고 내 얼굴을 스쳐갔다. 봄 햇살은 따뜻하고 깊게 내 내부의 과거의 흠을 채워주고 있었다.

나는 자유로웠다. 그 순간, 나는 놀랍도록 내 자신이 경쾌했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어두운 밤 홀로 현관문을 열고 신발장에 들어설 때 과거의 잘못들과 함께였다. 애써 떼어내려고 해도 나는 나의 잘못들과 못난 이별들에 미련을 두고 있었기에, 보이지 않는 과거의 환영들과 함께였던 것이다. 고단한 신발을 벗어 삶의 고단함을 안고 풀썩 침대에 몸을 던질 때마다, 무수한 공허의 신음이 뱉어졌다. 그 순간에도,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긴 적이 한 순간조차 없었다.

그런데, 나는 스물여섯 어느 날 내가 태어난 계절에 해를 즐기는 나를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깊은 수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나를 지키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오랜 방황에도 사람과 사랑을 내 중심에 놓으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정한 위로를 듣는 일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고 진심으로 믿어왔을 뿐이다. 무엇보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꺼뜨리지 않았을 뿐이다.

자유의 순간 공중엔 시작을 알리는 불꽃 폭죽 하나가 터졌다. 파도 위로 경쾌한 돌고래 떼가 환희의 점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찬 숨이 내게도 터져 나왔다. 그래, 이제 내 인생의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었구나. 내게는 또 하나의 지층이 남겠지. 그렇다면 나는 또 하나의 삶의 무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한 무늬이다.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어, 더 이상 과거에 잘못을 묻지 않고 행복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둘러보니, 내 곁에는 어느 새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많이 생겨있었고, 나는 수많은 감사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제 오랜 공허와 어리석음을 딛고, 괜찮지 않은 누군가와 아주 괜찮은 사랑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시 사랑을 꿈꾸며 봄볕에 말쑥이 웃어본다. 그리고 수많은 출발을 떠올려 본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끝과 시작이다. 봄에 겨워 아직 출산으로 인해 몸을 추스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봄아기를 낳았으니, 친구 역시 엄마로 태어난 것이다. 친구에게 축하와 응원을 건네니 훌쩍 삼십 분이 지났다.

이 봄, 이렇게 남김없이 행복할 수 있다니 이제 내겐 바람과 강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조금 생기 있게 만든 소스는, 언제나 용기였으므로. 다시 용기를 피워나 올리기로 하다. 이렇게 괜찮지 않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근사한 사람이었으므로.


스물 네 개의 봄이 깔린 내가 오늘도 괜찮지 않은 수많은 당신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당신을 지나고 깊고 따뜻한 봄볕이 당신 내부의 봄을 덮어준다면, 부디 자유로워라 당신. 그리고 사랑의 불꽃을 피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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