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가 책 틈에 껴놓은 엽서를 읽었다.
‘누구의 사전’이라 이름 붙여진 엽서엔 자신이 생각하는 단어의 의미가 적혀 있었다. 이를테면,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 같은 것.
사랑에 대한 정의도 있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가장 잘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 텍스트를 읽고 잠시 공기의 흐름이 멈추었다.
사랑?
나에게 사랑은 지금 무엇이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지?
한동안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파편과 감정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사랑은 나를 들볶지도 않았으며, 잠 못이루게 하지도 않았다. 답장이 오지 않는 메시지앱을 1분 1초 심장을 말려가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다리면 그 사람에게서 생활의 말과 사랑의 감정이 전해져 왔다.
수상하고, 이상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에게 이런 적이 있었나? 이건 무슨 징조지?
다름 아닌 사랑이 잘 되기 시작했다는 징조였다.
나 역시, 그 작가처럼 가장 잘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었다.
각자의 색깔이 어우러지되 혼탁해지지 않으며, 같이 있을 때 웃음이 나고 즐겁고, 서로의 일을 응원하고 서포트하며,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나누고 눈동자를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는 일.
언제 어디에 있어도 믿음으로 연결되어 불안하지 않고,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생각으로 마음 속에 스며드는 것.
하늘을 날기 보다 두 발로 땅을 밟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온화한 바람을 느끼며 안정적인 사랑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을 느끼는 것.
무엇보다 매일 눈을 떠도 그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변함 없이 있다는 것.
사랑을 무척이나 잘하고 싶었을 때, 꿈꾸었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꿈이 아니라 현재이다.
숱하게 어리숙한 사랑에 고꾸라졌던 서른 다섯의 내가 결국 얻어낸 것은 위대한 사랑이었다.
별 것은 아니고, 믿음이라는 땅에 두 발을 딛는 사람을 만난 것.
위대한 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공기 같다.
일부러 많은 것을, 좋은 것을 채우려하지 않아도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의 공기와 무드가 다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왔을 것이다.
어째서 사랑이 잘 되고 있는거지? 자문했다.
그 연유는 결국 ‘내가 나를 대하고, 내가 내가 해주는 것‘에 있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나를 귀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나에게 그러하듯이.
사랑은 기대는 것이 아니다. 목매는 것도 결코 아니다.
사랑은 스며드는 것이다. 물드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해서 내 삶을 상대에게 기댈 수 없다. 조금 어깨나 품을 빌리고 빌려주는 것과는 별개다.
사랑은 삶을 더 풍요롭고, 풍부하게 하지만 또 너무나 쉽게 감정을 곤두박질치게도 한다. 포악하고 위험한 얼굴도 가지고 있다.
위험한 사랑의 횡포에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으려면 나의 오늘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가 사랑하는 방식으로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의 연락이 좀 늦으면 어쩌겠나.
재촉은 좋지 않다. 온신경을 폰에 두는 것도 건강에 해롭다.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면 연락이 좀 늦는 것쯤이야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그 시간에 나는 나를 위해서 시간을 쓰면 된다. 오늘을 내가 좋아하는 일들과 취향으로 채우면 된다.
서점에 가서 인사이트를 얻고, 새로 생긴 카페를 탐방하고, 좋은 향기를 맡고,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공간을 방문하고, 버터향이 그윽하게 퍼지는 베이커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색다른 물건을 구경하고, 명상과 요가에 집중해보고,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응원하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샤워를 하고, 감도 높은 감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과 같이.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충분히 ‘홀로의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내가 나에게 이롭고 의미 있는 시간을 주는 것과 같이 말이다.
사랑은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나 공고하게 결합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생활은 따로다. 개인의 것이다.
그 사람에게 충분히 홀로 좋아하는 것을 할 시간을 주는 것이 사랑의 지속을 주효하게 만든다.
모든 취향과 관심사가 들어맞아 함께 하는 것이 많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따로 자신의 시간에 몰두하는 것이 좋다.
물론, 그 부분에 있어 아쉬운 점도 있고 서운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인내하고 감내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도 빠짐 없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면서 채워가야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사랑에 온 기대를 걸지 않고, 온 기다림을 걸지 않고,
오늘의 나에게 새로운 경험과 씬을 선물하고,
나에게 그랬듯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
언젠가부터 연습처럼 내가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수상하게도 사랑이 잘 되기 시작했다.
어쩐지 내면이 건강해진 것 같고, 안색도 밝아진 것 같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변한 것만 같다.
부수적인 효과로 불안감을 끄고 부정적인 감정도 잘 망각한다.
또다시 사랑의 풍파가 올지 모른다. 그러나 올테면 오라지.
지금, 사랑의 순간은 흔들림 없이 충만하고 온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