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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KTUS Apr 03. 2017

오버 더 펜스 : 평범하고 위대하게

우리는 우리를 잘 모른다. 그럼에도 꿈 꾼다. 펜스 저 너머를.

오버 더 펜스, 야마시타 노부히로, 2016


사토시, 너는 너야!


그렇다면 자신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는 한 여자의 손목을 잡고

애써 그녀를 진정시키는 시라이와, 당신은? 당신은 누구야?


.

.

가끔은 누군가를 설명할 때 그 사람의 생김새와 습관을 늘어놓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다.

다섯 가지 즈음 이상 그 사람이 지닌 것에 대해 말하다 보면 그 사람의 정체가 조금은 탄로나기 마련이다.


시라이와, 머리가 덥수룩하고 수염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그래도 섹시한, 눈빛이 우수에 젖어있는, 늘 단출한 피케이 반팔티셔츠가 통이 큰 바지를 입는, 말수가 없는 듯 보이나 적당한 때에 말을 이어가는, 실업 수당을 받기 위해 직업학교 목수과정을 밟고 있는, 차 없이 느리게 패달을 밟아 자전거로 통근하는, 퇴근길에 튀김 도시락과 맥주 두 캔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홀로 저녁을 먹는, 창을 바라보며 바다소리를 듣는, 곧 직업학교의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는.


그렇다. 시라이와는 사십대가 되어 다시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는 한 남자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그에게서 중년의 분위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가 지닌 특유의 안정감 있는 말투와 걸음걸이, 무언가를 응시할 때 늘 자박하게 물기로 젖어있는 눈빛 때문이다.


.

.

그는 이혼했다. 사년 전, 아내와 헤어졌다. 갓난 딸이 있었다.

그때는 도쿄에서 지낼 때인데 일이 많아서, 참 많기도 많아서,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어느 날, 야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아내는 딸의 얼굴을 배게로 누르고 있었다.


그후, 아내는 친정으로 떠났다.  

아내가 떠나고 시라이와는 혼자서 지냈다.


시간이 흘러서 시라이와는 장인이었던 사람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서 시라이와는 나쁜 사람이 되어있었고, 더이상 어떠한 연도 이어져서는 안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편지를 어느 책 한 켠에 끼워두고 시라이와는 오랜 시간 혼자 지냈다.
    ⏤쓸쓸하고, 조용히, 그리고 사그러들 듯이.

그 한 통의 편지가 그의 시간을 설명하는 표상 혹은 징표 같은 것이었으리라.


.

.


시라이와의 지난 인생은 그랬다.


참 평범하고, 충실하고, 모난 데 없이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고 그저 열심히 살았다

이러한 인생은 그저 그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까?


시라이와,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사토시다.


사토시는 낮에는 유원지에서 스탭으로 일하고, 밤에는 호스티스바에서 일한다.

호스티스바에서 타조가 구애하는 모습을 따라하며 바를 누빈다. 아니 날뛴다가 좀 더 정확할지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군더더기 없이 유연해 보이는 그녀의 몸이다.

그녀의 몸은 가볍고 경쾌해 보인다. 스트레칭도 아주 잘 되어있는 듯하다.

몸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단 증거다. 그녀는 아주 가벼운 몸짓으로 아무 데서나 타조의 구애 장면을 흉내낸다.

손목을 꺾어 백조의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백조 모양의 손으로 웃으며 사람들을 쪼기도 한다. 모두 유원지 동물원에서 본 것들이다.  



인생의 경륜(?)이 조금 깊은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 여자가 이리 행동하는 이유를. 이 여자, 가슴 속을 채워줄 '무엇' 인가를 원하고 있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여자는 쉽게 아무 남자하고 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씽크대 앞에 쭈구려 수세미로 몸을 닦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썩을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그녀, 미치도록 자신의 육체가 참아지지가 않는다.

그녀, 상처가 날수록 상처가 깊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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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사랑은 쉽게 빠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랑은 찰나보다 빠르다. 깊어지는 것이 오래 걸릴 뿐.


시라이와와 사토시는 첫 만남 이후,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빠진다.


시라이와는 쓸쓸하고 느리게.

사토시는 아주 정열적으로 미친 듯이.


.

.


시라이와는 사토시가 보고 싶어 그녀가 일하는 유원지를 찾는다.

둘은 봄날 저녁에 동물원 데이트를 한다.


사토시는 시라이와에게 흰머리 독수리의 구애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발레리나처럼 그것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두 마리의 수리가 공중에서 발톱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온다. 그들은 그렇게 진짜 사랑에 빠진다.


그때, 하얀 깃털이 꽃비처럼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흰머리 수리의 구애가 무척이나 성공적이고 로맨틱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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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시는 닮은 듯, 다른 듯 자신에게 없는 면모를 지닌 시라이와와 이끌리듯이 사랑을 나눈다.

열정적으로 그에게 달려든다. 감미로운 순간이다.


밤.

사토시, 잠든 시라와이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있는 결혼 반지를 본다.


"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죽은 듯이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토시는 시라이와에게 윽박지르며, 자신의 충동과 불안정함을 드러낸다.

하룻밤에 품에 안긴 남자에게 모든 걸 맡기고, 허무하게 모든 기대를 허물어 뜨리는 사토시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사토시는 시라이와에게 나쁜 말을 쏟는다.


시라이와는 누군가에게 또 한 번 잘못한 사람이 되었다.


잘못이란 거, 살면서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참 빈번하게도 발생한다.
명백한 잘못도 많지만 명백하지 않은 잘못 또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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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와와 사토시의 강렬한 만남도 잠시, 시라이와는 다시 목수과정을 밟는 일상을 살아간다. 곧 정비과와 건축과의 소프트볼 시합이 있다. '교화'의 목적이 어렴풋이 보이는 이러한 운동 프로그램은 왜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것일까. 또 하필이면 왜 '야구'가 아니고 '소프트볼'일까. 실업수당을 받고 직업교육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야구보다는 소프트볼이 어울린다고 누가 미리 판단이라도 해놓은 것일까?


시라이와는 사토시의 생각을 지우기 위해, 방망이를 휘두르고 괜히 슬라이딩을 한다. 그는 모래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튀김 도시락과 맥주 두 캔을 사들고.


사토시에게도 특별한 일은 없었으리라. 유원지 놀이기구에서 무료하게 아이들의 벨트를 묶어주고, 밤에는 야한 옷을 입고 술상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 몸을 세차게 닦아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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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서로가 그립다.
사랑이란 것이 그들에게 짐작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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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사토시는 시라이와를 찾아 간다. 제법 담담하고 씩씩한 얼굴이다.

자신과 호스티스바에 동행해 줄 것을 그에게 부탁한다.


사토시는 여전히 가슴 패인 원피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서 타조의 구애를 춤춘다.

값싼 여자, 정신 나간 여자라고 손가락질 들어도 그녀의 춤에는 거침이 없다.


그녀를 보는 시라이와의 눈은 빛난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은 잃을 것이 없다고.

시라이와, 그녀의 구애가 이끄는 대로 화답한다. 함께 춤을 춘다.



그녀 가까이로 가서, 그녀에게 속삭인다. 다가오는 소프트볼 시합에 와줄 수 있냐고.


사토시, 가겠다고 미소를 띄우며 대답한다.  


.

.


한편, 시라이와는 사 년 여만에 전 아내를 만나기로 한다.

재회에서 시라이와는 전에 볼 수 없던 아내의 밝은 얼굴을 본다. 그녀는 상처를 잊은 듯이, 말쑥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그에게 결혼반지를 돌려 주며, 친구가 되자고 한다.


시라이와는 건강하고 씩씩해진 그녀 앞에서 긴 머리를 온통 떨구며 서럽게 운다.

따가운 늦봄의 볕도 그의 눈물을 말리지 못한다. 잘못이란 거, 그는 분명 통감하고 있다.


사토시는 멀리서 시라이와의 울음을 지켜본다.

시라이와의 삶에 자신이 개입될 수 없음을 분명히 느낀다.

사토시, 차를 몰아 유원지로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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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가 발칵 뒤집혔다. 사토시가 동물원의 모든 철창을 열어 동물들을 탈출시킨 것이다.


"도망 가, 어서 도망 가, 탈출해 어서 탈출하란 말이야!"


사토시는 온 동물원을 뛰어다니며 동물들에게 외친다.


시라이와는 소동을 일으킨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마침내, 흰머리 독수리 앞.


사토시는 철창의 문을 열고, 흰머리 독수리에게 탈출하라고 소리친다. 울부짖는다.

직원의 만류에 곧 문은 닫힐 것이다. 빠져 나갈 문의 틈, 시간의 틈이 얼마 없다.

흰머리 독수리는 뒤를 돌아 울부짖는 사토시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 발을 떼지 않는다. 날아가지 않는다.

그대로 그 안에 갇힌다.


사토시, 주저 앉는다.

그리고 철창 사이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시라이와를 본다.



사토시, 탈출을 시도하듯이 시라이와를 피해 무작정 달려 나간다. 시라이와는 사토시를 붙잡고 그녀를 진정시키려 한다. 사토시는 가슴에 맺힌 말을 토해낸다.


사토시 :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시라이와 : "사토시, 너는 너야!"


둘은 한 바탕 소요 후, 서로를 부둥켜 안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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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시라이와는 사토시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한 남자의 담담하고 서투른 고백이 거기 있다.



"사토시, 너는 넌 스스로를 망가졌다고 하지만
난 남을 망가뜨리는 쪽이니 너보다 훨씬 나빠."



아주 느린 음성으로 어디선가 듣고 있을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사토시, 푸르른 어스름에 바다를 보며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저 멀리 먼 길을 떠났던 새들이 돌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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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볼 시합날이 왔다.

시라이와는 사토시가 자신을 응원하러 와줄지 오지 않을지 모르겠다. 기대할 뿐이다.


경기가 중반으로 가도록, 사토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시라이와, 응원해줄 사람이 없어서 조금은 외롭다. 아니 사토시가 오지 않아서 외롭다.


그리고 이윽고, 시라이와가 타석에 들어서자 저 멀리 사토시가 보인다.

가방에 무언가 먹을 것을 한 가득 싸들고. 그녀의 웃음 해맑다.


사토시, 시라이와를 찾는다. 타석에 서있는 시라이와를 보고 경쾌한 몸짓으로 춤을 춘다.

타조의 구애 춤을 춘다. 그녀, 모빌처럼 바람에 나부낀다.


시라이와,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홈런을 친다. 아주 세게, 아주 제대로 맞은 공은 아주 높다랗게 날아간다.

오버 더 펜스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모른다. 타인은 더욱 모른다.
 
그 미지의 상태에서 잘못이 생겨난다.
이따금씩 그것은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 그러한 잘못들이 모여 평범함이 된다.
인생의 얼마간은 잘못으로 점철되었기에 평범함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토록 평범한 고독의 실체는 결국 자신과 타인을 잘 모른다는 폭력 그 자체이다.

문제는 그럼에도다. 그럼에도 사랑을 꿈꾼다는 것이다.

'조금은 어긋난 우리지만 함께 해볼래?'라고
사토시에게 수줍게 말을 건네는 시라이와의 평범함 속에
꿈이 속살거린다는 것이다. 보란듯이 위대하게. 펜스 저 너머로"




추신 : 시라와이의 여름방학은 참 뜨겁겠다.

추신 2 : 이 영화에서 좋은 사람 혹은 좋은 인간이란 말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최악의 인간만이 등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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