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임의 각성
[단편] 포식의 연쇄: 슬라임의 각성
심해의 심연이 지상으로 역류한 듯한 밤이었다.
괴물은 거대했다. 눅눅한 심해의 악취를 풍기는 그 심해어 괴물은 아가리를 벌려 거구의 판다를 통째로 삼켰다.
포식의 완성 직전, 동료 판다의 필사적인 일격이 괴물의 아가리를 비틀었다. 삼켜졌던 머리가 점막을 뒤집어쓴 채 다시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 삶과 죽음이 뒤엉킨 비릿한 혈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이 기괴한 생태계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다.
전투의 소음 너머, 바닥을 기는 무정형의 존재가 있었다. 슬라임. 그것은 형체도 자아도 없이 오직 허기라는 본능에만 충실했다. 슬라임은 거대한 심해어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압도적인 체급 차이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심해어의 일격은 무자비했다. 단 한 번의 짓눌림에 슬라임은 수천 개의 조각으로 파편화되어 흩어졌다.
거기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잘게 부서진 슬라임 조각들은 기묘한 액체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치 치명적인 독약을 들이킨 것처럼, 그것들의 본질이 변이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점성은 사라지고, 포크레인의 버킷처럼 날카롭고 딱딱한 금속성의 칼날이 돋아났다. 전갈의 꼬리처럼 치명적인 독침을 품은 그 끝단은, 스치기만 해도 생명을 정지시킬 맹독의 기운을 뿜어냈다.
변이된 슬라임은 이제 거대 괴물을 향해 전진하려 했다. 길을 비켜야 하는 통로, 그곳에 한 부부가 있었다. 공포에 질려 발이 묶인 채 허둥대는 그들의 느릿한 움직임은, 이미 광기에 물든 슬라임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비켜."
말은 없었으나 살기가 공기를 메웠다. 슬라임은 더 이상 심해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목표는 수정되었다. 아니, 상실되었다. 칼날처럼 변한 촉수가 비명을 지르던 부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포식의 대상은 이제 거대 괴물이 아니었다. 눈앞의 연약한 인간들, 그리고 도시 전체였다. 슬라임의 투명했던 몸체는 이제 억눌린 분노와 독기로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다음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