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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May 30. 2020

속초의 기억

첫 속초여행

첫사랑, 첫 아이, 첫 출근 누구에게나 첫 경험은 라일락의 쌉싸래한 잎처럼쓰기도 하고 아카시아 향처럼 살랑살랑 달달하기도 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도 기억에 남는 첫 경험이 여럿 있다. 그중에 하나가 속초의 대한 기억이다.      

‘서른 넘어 속초를 처음 간다니 내가 봐도 참 어수룩하다’

이런 생각에 전날부터 밤잠을 설쳤다. 가는 길마다 새로운 풍경이다. 맘 같아서 다 둘러보면 속초는 사나흘 걸려 도착할 셈이다. 한여름 너울대는 양수리 강물은 대책 없는 막힘에 어서 가라고 찰싹찰싹 엉덩이 쳐주듯 출렁인다. 동요를 틀어주자 아이는 봄날 마당에 풀어 논 병아리처럼 쫑알쫑알 대고 아내도 오랜만의 여행이라 연신 좋다 좋아를 남발한다. 구불구불 백두대간을 힘겹게 내려와 터널 몇 개 지나니 바람이 시원하다. 

정말 다 왔다 싶었다. 떡하니 자리 잡은 울산바위가 제일 먼저 반긴다.

“어서 와 속초 처음 와? 가보면 나처럼 눌러앉을 수도 있다”

라고 말하는 듯 삼복의 오후 햇살은 가뜩이나 웅장한 울산바위의 사이사이 스며 옹골진 자태를 뽐낸다. 처음 온 여름의 속초는 모든 게 들뜨고 새로웠다. 봄의 아지랑이처럼 모래사장의 어른거리는 열기 속에 형형색색의 수영복이 마치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화려하다. 출렁이는 파도소리와 짭조름한 바다냄새, 휴가의 자유. 삼박자가 어우러진 외옹치항은 완벽한 속초여행의 완성이다. 하지만 즐겁던 그날 저녁 아이가 계단에서 떨어져 입을 크게 다친 일이 생겼다. 계단에서 떨어진 두 돌이 안 된 딸내미 입에서 피가 철철 나니 머릿속이 하얗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순간 아이를 둘러업고 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수룩하다. 택시 얻어 타고 

“병원 응급실 가주세요”

하면 될 걸 피나는 아이 둘러업고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병원을 찾아 뛰어다녔으니...

화려한 네온사인이 출렁이는 여름밤의 속초에서 보이는 병원 문만 깜깜 하다. 중앙시장 통에서 나오는 인파로 가득한 속초시내는 북새통인데 병원을 물어봐도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낯선 곳에서 애는 아프고 길은 모르고 온몸에 식은땀인지 진땀 인지도 모르게 흐르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다 응급실을 찾던 사이 다행히 아이는 피가 멈췄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안보이던 병원이 왜 이렇게 많이 보이던지 감자기 무능한 생각이 들어 식구들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래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어네 말이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의 퉁퉁 부은 입을 바라보며 안도의 쉼을 내쉬었다.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다리가 풀려 숙소 앞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처음 와 본 속초에서 별일이 없을 리가 있나 “

아내에겐 말도 못 하고 숙소 앞에 주저앉아 초보 아빠의 막연한 책임감에 새벽녘 깜깜한 수평선 너머 무심한 오징어배 불빛만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다. 

속초의 첫 경험은 라일락의 쌉싸래한 잎처럼 쓰기도 했지만 지나고 나니 아카시아 향처럼 살랑살랑 달달한 기억으로 바꿨다. 갈 수 없게 된 시간이 돼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 선보러 나갔을 때 상대방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다리 듯 속초에 대한 설렘이 없어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제는 속초는 눈을 감아도 동네 골목이 보일 정도로 익숙한 여행지가 되었다.

양평 한강 길이 왜 출렁였는지, 울산바위는 왜 속초에 머물고 싶었는지 짐작이 간다. 아이는 어느덧 넘어지지 않고 시집가도 될 나이가 돼 버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속초에 가면 어슴푸레한 저녁 동명항 아래 파도소리 안

주삼아 정아네 포장마차에서 해물탕 하나 시켜 놓고 아이들과 소주 한잔도 하고 싶어 진다.

“애들아 언제 이렇게 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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