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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May 31. 2024

맞춤옷에 대한 잠든기억

내 맘에 쏙 드는게 많으면...

출근길, 집 앞을 지나 첫 번째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면 여자 옷만 파는 작은 가게가 하나 있다. 나는 여자 옷에 대해 잘 모르지만 파스텔 색조의 헐렁한 톰보이 스타일의 옷들이 즐비한 것이 동네 옷가게 치고는 꽤 세련된 느낌이다. 아내에게 

"이번에 걸린 옷들 멋있네, 한 벌 사줄까?" 하고 물으면, 아내는 

"나한테는 안 어울려" 하고 대답한다. 

나는 

"맨날 어두운 것만 입지 말고 환한 것도 좀 입어봐"라고 말해보지만, 

아내는 

"난 작고 피부가 하얗지 못해 안 어울려"라며 지나치곤 한다.     




아내와 함께 산 지도 꽤 됐지만, 그녀의 취향을 정확히 맞추는 건 여전히 어렵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돈쓰고 욕 먹는 선물이 가방하고 신발이라 나는 아내에게 신발이나 가방을 선물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옷 선물은 기념일에 가끔 해줬다. 여자 옷은 너무 다양하고 유행을 타는 디자인이 많아 선택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색상과 모양이 화려해 큰맘 먹고 들어갔다가도 점원의 말에 현혹되어 원래 마음먹었던 디자인과 색상은 말도 못꺼내고 추천해주는걸 얼릉 집어오곤 했다. 그래서 나는 주로 계절 신상품 중에서 마네킹에 걸린 옷을 사준다. 다행히 대부분 아내는 만족해한다.     

"맘에 안 들면 바꿔도 돼" 하면, 

아내는 

"남자가 큰맘 먹고 사 줬는데 입어야지. 싫다고 하면 평생 안 사줄 거잖아?“

하고 웃어넘긴다. 그 맛에 가끔 옷을 사준다.


 옷 사주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아내의 덩치가 아담해서 웬만한 치수는 다 맞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마음에 드는 옷을 사 본 적이 별로 없다. 고등학교때 갑자기 살이 쪄 맞는 옷이 많지 않았다. 옷가게를 가면 지금처럼 큰 치수의 옷도 없었고, 제일 큰 옷이 105사이즈였다. 어머니는 일단 입어보라고 했지만, 나에겐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뻔히 안 맞는 걸 입어보라고 하는 게 싫었다. 어머니는 하나라도 입혀보고 싶어 했겠지만, 나는 입어보면 실망감이 커서 옷에 대한 흥미가 점점 더 없어졌다.     

그래서 재봉틀을 잘 다루시던 어머니는 직접 옷본을 떠 잠바와 바지, 그리고 남방셔츠를 만들어주셨다. 희한하게도 엄마가 만들어준 옷이 세상 편했다. 지금으로 치면 맞춤옷이니 편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엄마와 동대문 시장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천을 직접 고르니 마음에 드는 데다 크기까지 넉넉히 맞춰주어 엄마가 만들어준 옷만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입고 다녔다. 학교 다닐 때는 맨날 잠바도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옷만 입고 다녀서 아이들이 "넌 학교 다닐 때도 안 입었던 교복을 입고 다니냐" 하고 놀리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나만 편하면 됐으니 말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체중도 많이 빠져 일반 옷가게에 가도 맞는 옷이 많아 쉽게 살 수 있지만, 엄마가 만들어준 옷만큼 편한옷은 별로 없다. 모양이 예쁘면 팔뚝이 좀 끼고, 편하면 안쪽 주머니가 없거나 옷감이 맘에 안 들던가 하나는 꼭 걸린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여기에 주머니 하나, 품을 좀 늘리면 편할 텐데 하고 예전의 엄마 옷을 떠올리곤 한다.     

본가에 가면 아직도 어머니는 옷본을 보관해 두셨다. 지금은 커서 맞지도 않고 투박한 모양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재봉틀을 아직도 하시면 남방셔츠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그러나 재봉틀은 없어졌고, 어머니도 나이가 드셔서 이제는 옷을 만들지도 않으신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옷이 있다. 피부가 검으면 어두운 색이, 피부가 희면 밝은 색의 옷이 어울린다. 뚱뚱하면 세로무늬가, 키가 작으면 몸에 달라붙는 옷이 어울린다. 오늘은 어머니의 옷 같은 하루는 아니다. 다른 날보다 일찍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는데 버스가 늦었고, 일이 일찍 끝나나 싶더니 빠진 일이 생각나 다른 날보다 늦게 퇴근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하나가 꼭 안 맞는 것이다. 세상살이도 어머니의 옷처럼 편하고 내 맘에 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해주면 너무 좋겠다.     

맞춤옷을 얻어 입을 수 없으니 어느 정도는 맞춰 살아야 한다. 그리고는 말해야 하겠지. 

"너무 맘에 들고 편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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