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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May 27. 2024

고깃집과 주판에 대한 잠든기억

비오는 날  친구와 허름한 대폿집에서  술 한잔 하고 싶다

동네에 오래된 숯불 갈빗집이 있다. 돼지고기를 파는 식당인데 조용한 앉아 식사하는 집은 아니다. 드럼통을 잘라 원형으로 앉히고 의자는 엉덩이만 간신히 걸터진다. 둥그런 탁자엔 몇 개의 반찬만 놓이면 꽉 차고 가운데에 연탄이 들어가 있는 대폿집 스타일의 고깃집이다. 식구들끼리니 오붓하게 먹는 집이라기보다는 직장인들이 저녁에 술 한잔하기 좋은 고깃집이다. 


고기도 예쁜 고기보다는 밑간만 살짝 돼 있는 돼지 부속이 인기가 많다. 쫄깃쫄깃한 볼데기 살이 특히 맛있다. 연탄불엔 별다른 양념이 더해지는지? 타닥타닥 소리 내어 가며 익는 고기는 사람들의 수다와 함께 곁들여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주잔을 기울이게 한다. 집주인은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이다. 한 자리에서 이십 년 넘게 장사를 하셨다는 게 큰 자랑이신 듯 처음 오는 사람들한테는 고기를 구워주며 연신 고기 자랑을 하시곤 한다. 거나하게 한잔하고 계산을 하려고 하면 할머니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코에 간신히 걸쳐진 돗보기를 쓰시곤 주판을 튕기신다. 주판을 튕기시는 할머니를 보면 다들 헛웃음을 짓는다. 젊은 친구들은 주판을 처음 보는 친구들도 있다. 한쪽은 손때가 묻어 까무잡잡하고 주판알은 반질 잔질 한 게 헐거워진 주판 대를 타고 딱딱 소리를 낸다.

“멀쩡한 계산기를 두고 주판을 쓰세요?”

“난 이게 편해 계산도 정확하고”

“오래된거네요”

“내가 처음 장사할 때부터 쓰던 거니 이 집에서 제일 오래된 거네”

할머니는 능숙하게 주판알을 튕기시곤 계산서에 고깃값을 큼직하게 적어주시곤 계산을 해주신다.     

오랜만에 주판을 보는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생각이 났다. 주판이 흔하던 시절에 이 빠진 주판알이 집안에 몇 개씩 굴러다니곤 했다. 떨어져 나간 주판알에 성냥을 하나 끼우면 그럴싸한 미니 팽이가 된다. 성냥 끄트머리를 자르고 엄지와 검지로 교차시켜주면 주판알은 방바닥을 요리조리 잘도 굴러다녔다. 친구들과 주판 팽이로 팽이싸움을 하면 반나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곤 했다. 초등학교 때 동네에는 주산학원이 여럿 있었다. 머리 나쁜 아이나 좋은 아이나 신발주머니 같은 가방에 주판과 산수 문제집 같은 책을 가지고 물고기 회유하 듯 우르르 주산학원을 갔다. 주산 자격증 따는 것이 천재임을 인정하는 자격증인 양, 주산 9급부터 시작된 자격증은 나중엔 암산도 척척 해내는 천재로 만들어 주는 재주를 부린다. 주사 자격증 급수가 높아질수록 학교 공부와는 상관없이 공부 잘 할 수 있는 아이로 인정받으며 자랐다.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던 누나들은 주산과 부기 자격증을 열심히 떴다. 졸업 후에 은행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주산, 부기 자격증은 필수였기 때문에 저녁에 주산학원을 가면 초중고 학생들로 인산인해였다. 교실마다 몇 원이요 몇 원이 요를 연신 불러주면 초급반은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가 요란했고, 고급반은 손으로 책상에 주판 넣은 시늉을 하며 암산을 하고 있었다.     

계산기가 등장하고 컴퓨터가 나오면서 주판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문방구에서 팔던 주판은 흔적을 감췄고 골목에 인산인해였던 학생들은 입시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즘도 바둑학원이 인기 있듯이 주산학원을 보내는 엄마들도 있긴 하지만 입시 위주의 공부에 도움을 주진 않아 아이의 기억력과 수학능력 향상을 위해 보내는 일이 많다.




불과 몇 년 안 지난 추억이지만 우리 곁에 친숙하던 공중전화, 연필깎이, 500원짜리 지폐들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다. 쉽게 변하는 세상만큼 새로운 IT제품들이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때그때 적응되지 못하면 도태되는 느낌을 받으니 임대 기간 끝나면 갈아 치우는 스마트 폰처럼 바로 적응을 해야 살아남는 세상이 된 것이다.     

빠르고 급하니 정신도 없고 돌아서면 허전하다. 손끝으로 계산이 보이며 하나하나 퉁겨지는 주판알처럼 인생도 눈에 보이며 확인되는 느긋함이 가끔은 우리 곁에 있어도 좋을 거 같다. 주판알이 하나하나 내려갈 때마다 인생도 내리막을 걷는 것 같지만 일자리 4개의 주판알이 내려가면 10자리의 주판알이 하나 올라가듯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언젠가 큼직한 좋은 일이 생기겠지 하고 위안하며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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