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충대충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사는데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백 년 동안 반복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이제야 어느 지점에서 놓친 것이 보이고 놓아야 했던 것들이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 순환선에서 내릴 용기는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두려움!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에 쏠릴 시선!
상상 훈련(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봅니다.
환승역 도착 방송이 나오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앞을 막아선 등들을 밀치고....
글의 끝 [마치며]에 환승 차에 대한 기록이 아름답기를 바라며 상상을 시작합니다.
거실에 누운 남편의 등 뒤로 아침 해가 들어온다.
둘둘만 이불을 반쯤 사타구니에 끼워 넣고 오래 베어서 솜이 죽은 베개를 두 개 겹쳐 베고 있는 남편의
그 동그란 얼굴이 오늘따라 유달리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비타민을 끼니때마다 2알씩 챙겨 먹더니 얼굴에 윤이 나는 것도 같다.
바깥 창은 투명창이고 내 창은 불투명인데도 동으로 난 넓은 창으로 아침 해가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소파에 앉았는데 등이 따뜻하다.
열이 많은 남편의 실내복은 늘 반소매 메리야스와 트렁크 팬티다.
딸아이가 자라며 잠시 반바지를 겹쳐 입더니 언제부턴가 트렁크 팬티만 입고 있다.
'블라인드를 내려줄까?
아니지….
그럼, 진짜 한 낮까지 자버릴지도 모르니…. 그냥 두자.'
화장실 앞에 놓아둔 빨래통의 빨래를 색깔별로 나누었다.
흰색 옷, 속옷과 엷은 면티나 잠옷, 양말과 겉옷.
오늘은 흰색 옷의 분량이 제일 많다.
흰색 옷만 들고 가 세탁기 속에 던져넣고 액체 세제를 계량컵에 가득 따라 쏟아 부었다.
빨래양에 따라 세제량도 조절하라고 되어 있으나 무시한 지 오래다.
냄새만 빼도 되는 빨래가 있고 때가 묻어 손으로 애벌빨래를 했다가 세탁기에 넣는 경우도
있는데 빨래양에 따라서만 세제량을 조절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런 생각에 쇄기를 박아 세제량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쯤이다.
아이 셋 있는 엄마가 신발을 세탁기에 넣어서 빤다는 얘기를 듣고서부터다.
"아이 셋 신발을 어떻게 손으로 다 빨아요.
수건 걸레 한두 장이랑 세탁 망에 신발 넣고 세제도 듬뿍 넣고 세탁기에 빨면 깨끗해요.
세제는 좀 많다 싶을 만큼 넣어요."
큰아이가 기저귀 발진으로 소아과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준 '리oo스'의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약의 성분은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스테로이드' 라는 5글자를 확인하고 병원을 다시 방문했다.
"어떻게 갓난이한테 이렇게 위험한 성분이 있는 약을 처방할 수 있어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따졌다.
어안이 벙벙한 의사 선생님이.
"시중에 나온 스테로이드제 중 가장 안전하고 피부가 약한 여성과 아이들에게 많이 처방되는 약입니다.
사용 여부는 어머니가 판단하세요."
약을 바를 건지 안 바를 건지는 나더러 판단하라는데 대안이 없는 나로서는 인터넷에서 확인했던 스테로이드 성분의 부작용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아이의 발진 난 자리에 '리OO스'를 발랐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기 엄마들 손에 이 연고는 한두 개씩 기본적으로 있었다.
그리고, 약이 얼마나 좋은지 바르고 난 이후 벌겋던 사타구니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신혼 초에는 모든 가전제품의 상품 설명서와 브랜드 옷에 붙어있던 품질보증서를 모아 놓던 종이상자가 있었다.
설명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버릴 수가 없었다.
경고도 많고,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눈에 잘 띄는 곳에 설명서들을 모아두었었는데 결혼할 때 샀던 모든 전자제품이 새 제품으로 바뀔 때까지 박스의 설명서를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어렵고 불안한 세상이 알고 보니 별거 아닌 것에도 너무 경직되어 있어 그렇다는 생각이 내 맘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대부분 대충하고 대충 해도 별일 없고, 대충하며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보았고 경험했다.
세탁기를 돌리고
방학을 맞아 집에 있는 두 아이의 두 끼 식사를 준비하고
싱크대 하부 장에 묻은 물기를 행주로 닦고 싱크대 앞 바닥에 묻은 물기도 행주를 든 김에 대충 닦았다.
*다음주(2/9~15일)에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