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a Dec 19. 2020

글의 숲, 문장의 질감

저는 문화적 교양을 쌓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예술을 향유한다는 표현을 이해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책으로 가득한 서재,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어른들, 아름다운 것들에 쌓인 집과 동네....... 문화적으로 빈약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모든 게 어색합니다. 연애를 글로 배운 사람이 뭘 하든 경직되고 우스운 것처럼, 쏟아지는 색감과 조형미, 푹 잠기면 되는 현과 타악기의 음률, 그리고 속삭이는 문장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놀이공원에서 길잃은 어린아이마냥 얼어붙고 말지요.  어린 시절을 물가에서 지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뜨는 몸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숙제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감상 대신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공부해야 했던 미술, 음악, 문학 등은 예술 앞에 경직된 어른을 만들었습니다. 휘황찬란한 호텔 로비에 돈을 내야하는 줄 알고 겁먹고 들어서지 못했던 어린 시절처럼, 한동안 아름다움 앞에서 분석하고 의미를 찾으려 억지스레 머리 아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향유라는 단어를 이해한 것은 20대 중반, 기억나지 않는 그림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였던가, 시립 미술관에 가게 되었을 때 엄청나게 큰 유화작품을 보았지요. 의미나 구도, 사조 등등을 생각할 겨를 없이 색들이 나를 꽉 채우는 경험을 하면서 예술 작품의 향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색채 경험은 이후로는 다시 느낀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플레밍준>을 직접 본다면 그 기분을 다시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로부터 깨치게 된 예술 감상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대부분의 도시에 예술적 환경이 갖춰져 있어서 저처럼 촌스러운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신 그 감각을 쓸 여유가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요. 예술 감상의 감각이란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인데,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 감상은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타고난 명상 능력이고, 상처난 가슴을 흔적없이 아물게 해주는 정신의 연고이고, 사막처럼 황폐하고 목마른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든 생명을 빛나게 해주는 차가운 물줄기니까요.


그중에서도 가장 손쉬운 예술이 문학입니다. 직접 보러 가야 하거나 전기가 필요한 다른 예술과 달리, 문학은 누그저 종이로 이뤄진 책 한 권이면 되지요. 예술적으로 가난한 곳에서 태어난 저에게도 문학은 문턱이 낮았습니다. 소중한 책 몇 권이 있었기에, 문학을 감상하는 능력은 어릴 때부터 가질 수 있었지요.


문학은.. 소설이나 수필처럼 긴 문장이든 시처럼 짧은 문장이든, 본질적으로 인생을 견디게 하는 아름다운 선물인 예술입니다. 소설을 마음 졸이게 하는 이야기 줄거리라고만, 수필을 정신과 약이나 인생의 힌트서라고만, 시를 간지러운 달콤함이라고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미술관에서 그림 앞에 어떤 선입견도 두지 않고 가만히 서듯, 음악의 흐름에 귀를 그냥 내어주듯이, 나라고 외치는 자의식을 잠시 조용히 만든 채 문장 사이로 난 오솔길을 가만히 걷는다면, 문장의 질감이 영혼을 건드리며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초여름 새벽 이슬을 다 떨구지 않은 어린 풀잎들과 오래되었으나 새 잎을 틔우는 고목의 따뜻한 가지, 밤새 달을 향해 열려있던 달맞이꽃이 수줍게 닫히는 그 소리를 들으며 글이 열어준 숲을 한동안 걷다보면 폐에 쌓이는 숨마저 순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지요.

  

 


저는 어린 날 문학의 강에 푹 잠긴 채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글을 쓰려고 쓰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자랐고,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그것밖에 할 것이 없어서 글을 쓰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잠긴 물보다 더러운 탓인지, 예술을 하는 삶이 그리 쉽고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쓰고 싶었던 것은 발표하기가 어려운 시절이라서 그럴까요....


워터멜론 슈가 같은, 백 년 동안의 고독 같은, 활과 리라 같은, 그런 소설과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아무도 책을 내준다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예술의 숲에 온전히 잠기지 못하는 섬망상태의 세상에서 자극적이지 않은 글숲의 입구는 지나치기 십상이고, 몇 걸음 들어가더라도 지루한 풍경일 테니까요. 그렇기에 지루한 걸 감수할 만한 이름도 없고, 그걸 포장할 만한 배경도 없는 사람은 그 숲을 세상에 안내할 방법이 없습니다. 

절망에 빠지거나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책 읽는 사람도 구석에 살아서(파스칼 키냐르), 힘없는 사람은 서로를 찾을 수가 없는 거지요. 글의 숲이 점점 닫히는 이유인지도....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냥 재주가 모자라서일 거에요. 진짜 예술가는 어떤 구석에서든 그 힘으로 자신의 숲을 열고 있는 걸요. 인생의 가장 귀한 선물을 잊고 사는 사람들을 일깨울 만큼 힘있는 예술을 세상에 보여주는 걸요. 그러니, 글의 숲이 닫힌다고 한탄하는 것은 쓸모없는 걱정입니다. 힘없는 예술가의 좌절과는 별개로, 인생의 선물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단 몇 명의 천재만으로도 예술은 충분히 선물이에요.

        


작가의 이전글 그게 너를 꽃 피우게 할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