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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Oct 13. 2021

소유격 없는 신자유, 오징어 게임

- HOW TO 신자유주의: 운영방법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이 신자유주의의 우화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공의 번호는 456, 이도저도 아닌 보통 사람. 가난하고 실없지만 사람은 좋다는 평가를 받는 이웃이 우리에게는 넘칩니다. 성기훈도 딱 그 정도죠. 도박중독이라는 병을 갖고 있지만, 그가 그 지경이 된 데에는 자동차 회사 폐쇄와 두번의 창업실패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중년에게 이 정도면 평범한 스펙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 도박중독이 되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눈앞에서 동료의 죽음을 본 특별한 경험도 있지요. 평범한 인간에게도 개성은 있는 법이니까요.

 

456번은 평범하지만, 456억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을 거절할 사람은 많지 않겠죠. 단,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게임을 하기 전까지는요.

한 사람의 목숨값이 1억이라는 것을 안 다음 장삼이사들은 게임을 계속할지 결정을 하기로 합니다. 왜였을까요? 진행자는 이들 모두에게 삶의 벼랑끝에 매달린 사람들이라고 일반화했지만, 이들의 '인간의 존엄성'까지 벼랑끝에 다다른 것은 아닌 겁니다. 그 지경에 다다랐어도 존엄성이 1억 보다는 많다는, 최소한 인간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게임하다 총에 맞아 죽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진 자와 요행을 위해서라면 상관없다고 믿는 자의 비율은 1:1. 이 균형을 깬 것은 이 게임의 설계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지점부터 시리즈의 설계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게임 참가자들이 투표에 따라 섬을 한번 탈출한다는 설정이 <오징어 게임>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럼 과반수의 참가자가 반대함에 따라 이번 게임은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발표는 실상 게임 설계자 노인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소원으로 게임을 설계한 노인은 왜 게임을 멈췄을까요?

노인에게는 2가지 목적이 있었을 겁니다.

첫 번째는 인생의 황혼기에 마지막으로 "진짜로 즐겁게" 게임을 하고 싶은 목적.

두 번째는 게임은 공정하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업적 목적.


억지 춘향이라는 말이 있듯, 끌려왔다고 느끼는 참가자들과 나의 자유로 뭔가를 쟁취하려는 참가자들이 주는 '재미'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돈 많은 노인이라면 돈으로 사지 못한 것이 없었겠지만, 자유의지로 자신과 진짜 놀아주는 사람은 살 수 없었을 겁니다.


오징어 게임

 시청자들은 이 게임이 이 노인의 사업 목적대로 '공정'하고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주최측에서 왜 그런지 설명을 하라고 따지면 좀 움츠려 들겠죠. 보통 사람들은 총든 사람 앞에서 주눅들게 마련이지만(실제로 현금을 총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좀 당당하게 생각해봅니다.


우선 시작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정말로 공정하려고 했다면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계약을 체결했어야 합니다.

계약은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체결하기 마련입니다. 계약서에는 서로가 주고 받을 것들이 자세히 적시되어 있게 마련이죠. 하지만 이들은 게임이 뭔지 모른 채 섬에 끌려갑니다.

스포일러는 있었지요. 지나치게 잘생긴 사람과 딱지치기를 하면서 얻은 경험말이죠. 어린애 놀이치고는 큰돈을 번 다음, 참가자들은 게임 주최자들의 재력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게임은 주최자들에게만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프리퀄이라 할 딱지치기로 벋은 돈도 공돈이 아니었습니다. 돈 대신 뺨을 내주고 얻은 돈이었으니까요. 이들은 게임을 진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하기도 전에 첫 번째 게임에서 탈락합니다.

 게임의 중단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은 그 다음에 생겼지요. 죽은 이의 목숨값을 눈앞에서 본 후에요.

딱히 투명돼지저금통에 황금 조명을 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의 입을 다물 만한 장면이었습니다.  이것은 게임의 중심 추동이었습니다. 많으 사람들이 로또를 사는 이유, 다른 사람은 안 되어도 나는 될 것 같은 그 심리. 바로 눈앞에 떠있는 욕망덩어리를 본 사람들에게 '자유'라는 말은 치사한 장난질과 같습니다. '줬다가 뺐는' 느낌을 모든 이에게 남겨준 채, 게임 거부를 선택하는 이들을 마치 겁쟁이나 루저처럼 만들어 버리죠. 대중심리로 남의 기회까지 빼앗는 느낌, 그래서 반 수 이상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분노하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반대했던 이들의 대다수는 사회 밖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 다시 게임장으로 돌아옵니다. 바깥에서도 자신의 목숨은 개값도 안 되며,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깨달음. 그에 비해 눈앞에 빛나는 등불(말 그대로) 같은 가능성이 있는 곳이 더 나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로써 참가자들은 '자유의지'로 자신이 게임에 참가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마땅히 주최측이 짊어졌어야 할 짐까지 떠안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주최측은 아예 짐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르죠.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으니까요.

실패가 곧 죽음인 이 게임에 다시 참가할 때, 참가자들이 "자율적"으로 짊어진 것은 공범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저 자본들이 죽어가는 자들의 너무 싼 목숨값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계자는 아주 당당하게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죠.


너희들에게는 자유가 있었고, 너희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게임 참가를 결정한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너희의 책임이다.



틀린 말 같지 않은 이 말,

틀렸다는 느낌은 있는데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헷갈리는 이 말.

뭔가 찝찝하다고 평범한 사람들이 말할 때, 탄광 속의 카나리아 역할을 하는 예술가들은 그 찝찝함을 표현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미술감독이 참고했다는 에셔의 그림 2점을 보면 우리는 너희들이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징어 게임
에셔, <상대성>

에셔는 착시현상을 통해 출구가 없으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도형이나 구조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계단은 어지러움과 비현실적인 느낌을 줍니다.

출구가 정해진 미로 속에서 탈출할 수 없는 참가자들의 운명을 보여주는 장치이죠.

진행요원에 의해서만 열리는 출구는 죽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계단을 한번 오를 때마다 참가자들은 1억 원으로 환원되거나, 인간성을 조금씩 죽여야만 콜로세움 같은 침대 구조물로 돌아올 수 있죠.

콜로세움, 한국일보

오일남 역할을 한 오영수 배우님이 침대 구조물이 있는 곳을 '콜로세움' 같다고 하셨다고 하는데, 정말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로마 시대, 로마의 운영에 관심이 없기를 바라는 왕일수록 콜로세움을 크게 지었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가 엉망일수록 운영자들은 정신없는 볼거리로 인간들의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로마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논리적으로 떠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공간이 콜로세움이고 이곳에서는 피와 살이 튀는 게임에 귀족들이 돈을 걸며 놀았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침대 방에서는 정말로 피튀기는 살인극이 벌어졌죠. 설계자들은 이것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비용절감을 위한 것일수도 있는데, 이번 게임에서는 설계자가 함께 하다보니 중간에 멈춘 것일지도요....... 그러고보니 계급장 다 떼고 약육강식의 자연적 상태에서 이 설계자는 여자와 함께 보잘 것 없는 약자에 불과했습니다. 중간에 멈추라는 반칙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인물인 거죠.


우리는 콜로세움이 옛날 유적이라고 생각하듯이, <오징어 게임>이 우화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아마도 이 드라마를 다 본 분들은 기분이 개운치 않을 텐데, 그 이상함은 우리가 에셔 그림 속의, 오징어게임 속의 인물일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 때문입니다.


한심한 성기훈, 서울대 조상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발 한 번 삐긋하면 저 자리가 내 자리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애써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 게임의 설계자인 신자유주의 승리자들이나 참가자 후보인 우리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에셔는 우리에게 위상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에셔가 그린 그림을 이상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위치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셔의 그림을 위에서, 그리고 한번에 전체로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죠.

속임수나 비틀림, 잘못된 체계가 한눈에 보입니다.

비틀어진 궤변을 반박하려면 일단 시선을 바꾸고 시야를 넓히거나 좁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위상의 특이성은 이상할 것 없는 현실에서도 쉽게 혼돈을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해요.

만일 우리가 에셔의 그림이나 <오징어 게임>을 보듯 이 세상을 위에서, 전체적으로 내려다본다면 어떨까요?

 

에셔, <몬테첼리오>/ 허핑턴포스트


제가 위상에 대해 실감한 것은 섬에서 살면서부터였습니다.

혹시 에셔의 저 그림처럼 좁고 높은 지형에 살아본 적이 있는 분은, 산복도로라는 말을 알고 있을 겁니다.

평지에 살았던 저에게는 새로운 단어였지요.

좁은 섬의 산복도로는 특이합니다.

평지가 2차원 평면 그래프 안의 도로라면 산복도로는 3차원 입체 그래프 안의 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차의 위치를 지도 위의 위도와 경도로 말해줘야 한다고 할 때, 섬에서는 이 두 점만으로는 나를 찾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있는 위치가 이 섬의 어느 정도 고도에 있는지까지 말을 해야만 상대의 차를 만날 수 있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이 몇 개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대성이론 만큼이나 자본주의도 인간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입니다. 자본주의도 어려운 평범한 인간들에게 신자유주의는 어쩌면 양자역학 정도의 난이도일지 모르죠. 그리고 지금은 양자역학을 창시할 천재라 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영문도 모르고 섬에 끌려온 참가자들처럼 신자유주의라는 자본가들이 만든 쇼에 끌려온 신세니까요.

신자유주의는 정말 세계를 집어삼켰습니다. 그것도 정치권과 그 정치권을 지지하는 대중들에게 매우 새롭고 자유롭고 공정한 "글로벌 스탠다드"로 대접받으면서 말이죠.  우리나라에도 한참 불었던 광풍들.... 민영화, 유연한 노동시장, 코인, 개미, 자유계약 노동자, 프리랜서....... 신자유주의자들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무시하는 나라나 사람들을 자본으로 죽음으로 내밀었고, 이론가들은 "낙수효과"를 떠들었죠. 우리가 우리 손으로 농사 짓고 일해서 떳떳하게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대자본가들이 쉽고 즐겁게 돈을 쓰면 거기서 남는 콩고물을 받아 챙기라는 말을, 정말로 세계에서 천재들만 다닐 수 있다는 대학의 교수들이 노벨상을 받은 이들이 말했습니다. 자긍심 강한 인간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개소리를 정성스럽게도 했던 거죠.

 이들 운영요원들이 얻는 것은 '낙수효과'로 인한 것뿐 아니라, 멋모르는 참가자들의 피묻은 장기도 있었죠. 사실 쾌감을 주는 돈의 액수란 한계가 있어서, 이 정도 만이라도 운영요원들에게는 충분했던 겁니다. 이들은 설계자에게 '왜'냐고 묻는 것이 금기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저 위의 VIP룸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던 겁니다.  

 그건 그렇고,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고나니 보이는 이 악당들에게 대중들은 어떻게 스스로 먹이가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처음부터 불공평한 시작이었죠. 자본가들이 카르텔을 만들면 당할 나라가 있기나 할까요? 하지만  대중들은 정말 신자유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나라의 민주투사들도 그랬죠.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프로파간다가 '자유'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징어 게임>


  子曰, 疾沒世而名不稱焉
 -<論語>


논어 위령공 편에 나오는 이 말은 해석이 분분합니다.

어떤 이는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군자는 죽은 뒤에라도 이름이 칭송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군자는 죽을 때까지 명성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한다."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논어금독>을 쓴 리쩌허우의 해석을 따릅니다.


군자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명칭이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미워한다.


 리쩌허우가 말했듯이, 바로 그 앞 구절이 "군자는 자기 능력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였으니까요. 양명학을 만든 왕양명은 '稱'은 마땅히 '맞는다'로 읽어야 한다는 주석도 있듯이, 이 해석이 훨씬 공자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자의 의도는 허명-공 보다 큰 명성이나 그 반대를 뜻했겠지만, 저는 세상 만물을 지칭하는 용어의 문제로도 읽어봅니다.

이 말이 아니라도 학자들은 항상 말, 즉 기표에 민감합니다. 아주 심하게 강조를 하지요.


고전을 공부하다 보면, 전거, 즉 너의 말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를 지겹게 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양은 안 그런 것 같지만 서양에 뿌리를 둔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언어를 명확히 정의내리지 않고서는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이 세상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본뜨거나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처럼,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고,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접수하면서 절대 말하지 않은 것이 바로 '소유격'입니다.

'자유'를 주장하지만 결코 '누구의' 자유인지 말해주지 않았지요.

혹시 번역이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1970년대부터 활개를 친 이 설계의 이름은 영어로도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입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유'는 긍정이고 축복의 단어로 가르쳤습니다.

자유의 반대가 구속, 자유의 이미지가 초원이라면 반대의 이미지는 감옥이었죠.


하지만 역사적으로 '자유'가 어떻게 쓰였는지, 전거를 들여다봐도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신자유주의가 서양에서 왔으니, 로마까지 가보면 자유의 소유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로마는 자유의 도시였지만, 그 자유는 '시민의 자유', 즉 시민이 누리는 자유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시민은 소수였지요.  '돈 있는 남자'가 아니면 시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긴 공화정, 황제에게 지배받지 않을 자유는 이 '돈 있는 남자'들이 누리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즉 노예와 여성을 소유할 수 있고, 누가 나에게 뭐 해라 마라 잔소리 듣지 않을 자유가 필요했던 것이죠.

출처: 위키백과

고대 말고 근대에서도 소유격이 포함된 '자유'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자유'의 예문은 미국의 형성을 자세하게 알려준 <분열하는 제국>을 읽으면 아주 잘 알 수 있죠.

디프사우스라고 불리는 노예왕국의 지주들이 얼마나 열렬히 '자유'를 위해 싸웠는지 놀랄 겁니다.

흑인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자유, 연방 대통령을 무시할 수 있는 자유, 내 농장도 아닌 도로를 위해 세금을 내지 않을 자유....... 그들은 이 자유를 위해 정말 전쟁까지 불사했습니다.



제가 왜 공자님의 疾沒世而名不稱焉을 생각했는지 느끼셨겠죠.

신자유주의에서 생략된 주어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여행이 필요하니, 우리는 4차원의 좌표에서 이들의 궤변을 돌파해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자본주의에서 승리한 존재들의 뇌의 구조,

사이코패스로서 자아상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구별 의식에 대해서 말이죠.



마지막 게임을 할 수 있는 인원은 단 2명입니다.

이 게임들은 사실 신자유주의적 인간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성장 커리큘럼이나 다름없죠.

신자유주의에서 낙오한 인간들이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는 것을 터득해야만 마지막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 안의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운입니다.


456번 성기훈은 보통사람이기에 자신의 목숨 앞에서 결국 살아남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를 두고 오일남은 묻죠.


'자네는 공정한가?'


죽음을 앞두고 자본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불확실성 앞에 선 게임 설계자가 열심히 변명을 하는 이유는, 그도 한 때는 인간이었기 때문이겠죠.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약육강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봐라 착하다고 하는 인간도 마지막에는 결국 추악해질 뿐이다, 그러니 내 선택이 뭐가 나쁘냐? 나는 오히려 세상 보다 쉬운 방법으로 공정하게 부자가 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터득한 후, 마지막에 외칩니다.


안 해!


물론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극한 상황이 아닌 이상 다시 보통 사람이 된 것일 뿐이죠.

하지만 조상우는 기훈이 형이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을 멈춥니다.

왜냐하면 그가 거부하면, 454명의 죽음이 개죽음이 되기 때문이죠.

게임을 까발릴 위험이 있는 보통사람을 이 세상으로 내보낸 건, 설계자가 마지막 게임을 하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여기서 프론트맨과 설계자의 차이가 보이죠. 이 세계에서 낙수효과를 누리며 살아야 할, 어쩌면 자본가가 될 지도 모르는 프론트맨은 그를 계속 감시하지만, 설계자는 그저 마지막 유희, 혹은 변명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게임의 승자는 보통사람이 됩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주머니를 뒤지던 사람이 데려온 것이기는 하지만,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시스템의 하나인 경찰차가 온 것은 매우 의미있어 보입니다.



무료한 자본가들이 인간이 아닌 이유는 그들이 보통사람들의 것을 훔쳤기 때문이죠.

이 사회의 시스템에서 얻은 부로써 지불해야 할 자본을 훔침으로써, 낙오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러 올 경찰 시스템 같은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에서 사이코패스는 승승장구하고 편안하게 죽어가는 게 현실이지만,

<오징어 게임>은 보통 사람들이 봐야 시청률이 올라가는 시스템이니까 결국은 결론을 내립니다.

설계자는 보통 사람과의 마지막 게임에서 졌고, 그는 불확실성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불확실성, 카오스 말이죠. 운이 나쁘다면 누구나 끌려갈 수 있는 알 수 없는 게임장으로 갔을지도 모를, 그런 혼돈말입니다.


주인공이라 할 두 명의 보통 사람, 도박중독자 성기훈과 경찰 황준호.

이 게임장에서 나가기 위해 성기훈은 인간성에 큰 상처를 입었고, 황준호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첫 살인 후 경찰 배지를 바다에 버린다는 면에서, 그는 공적인 존재가 아니라 형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보통사람이 된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며,

위상의 중요성과 함께 상처입은 보통사람이 살 길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더라도 게임장의 운영법칙을 알고 그것을 교란시켜야 합니다.

혼자는 죽을 수도 괴물이 될 수도 있지만, 456명이 한줌뿐인 운영요원들을 제압하려 했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었겠죠.

물론 지옥에서 온 형편없는 낙오자들인데다 에셔의 계단 속에 갇힌 인간들이었지만.......


작가님, 글을 올리지 않은지 무려 60일이나 되었네요~


실은 저만 해도 계단 속에 갇힌 인간입니다.

현생을 유지하며 글쓰는 사람이라 때로는 1분 1초가 아쉬운 사람에게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은 우선 순위가 아니죠. 딱히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는 느낌도 없이 그저 글을 갈무리하는 입장인데도 브런치의 알람은 부드러운 압력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카카오 계열 회사의 콘텐츠를 늘려주는 이 일을, 저는 또 하고 있네요.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 광장에 나갈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이죠.


그때까지, 쉽게 신체포기각서는 쓰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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