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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강 Jun 08. 2023

착한 사람

- 생각보다 복잡한 착한 사람

전에 한 철학자로부터 비난처럼 느껴지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자로서 어떻게 유교를 좋아할 수 있어요?"

그렇잖아도 낯선 사람 앞에서 긴장하는 편이었던 터라,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 남성 철학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기는 했습니다.

그 남성 철학자가 말한 유교란 조선의 병폐라는 오물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 속 단어였겠죠.

반면 제가 좋아한다고 말한 유교는 태어난 그 시대의, 또는 그 시대를 해석해간 사고의 저장소로서의 사상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사상이라는 말을 하기도 쑥스러운 <논어>와 그 주석이라 할 수 있는 책들을 말하는 것뿐이었죠.

유교의 사상이라 하면 적어도 성리학까지는 가야 할 텐데,  이理와 기氣에 대한 논증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죠.

생각해보니, 책이 키워준 저는 종교와 사상도 책과 이야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역사 속에, 오용한 사람들로 인해 때묻고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끔찍한 범죄의 의미까지 뒤집어쓴 그런 세월 속의 단어는 제가 아는 단어와 전혀 다른 것이었었죠.

'마왕퇴'에서 나온 문서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는 말을 하기 위해 사설이 길었네요.

그러니까 순수한 책으로서의 종교경전과 사상서는 한 사람의 약점은 들어있을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 순수한 생활 수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아리송한 것들, 살면서 지켜가야 하는 것들을 위대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의 고뇌로부터 배우고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 느꼈던 위대한 책의 요약 키워드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읽은 어렵기도 하고 이런저런 가설과 증명으로 가득찬 책의 결론도 아주 촌스럽게 말하자면 '착하게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압니다.

'착한 사람 컴플렉스', '착하다는 말은 곧 바보같다는 말이다.', '착하면 이용당한다.', '착한 척 하지 말고 화가 나면 화를 내라.' 등등.... 이 사회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아가라는 심리 에세이나 성공하기 위한 자기계발서, 인간 사회 적응 노하우 등에서 '착한'이라는 말이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딱히 'K 장녀'라는 뉘앙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녀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꽤 갖고 살았습니다. 친구나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기기 힘든, 어려운 일 앞에서 눈치싸움할 때는 나서서 해버리는 스타일로 '착하다.'는 말은 들은 편인 저도 20대 초반에는 이 '착함'이라는 말이 욕설처럼 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엉망인 계약으로 원고료를 받지 못하는 일을 몇 번 겪으면서, 노동의 대가에 대해 요구를 제대로 못하는 저를 보면서 스스로 한심한 때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 저는 여전히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겪은 인생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착하다'는 말이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던 시기에 필사적으로 전도된 가치관을 제 자리에 놓고자 붙들었던 책들에서 근거를 찾아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교의 중요한 기본 전제 중 하나가 인간에게 사단이 있다는 것이죠. 맹자는 인간에게 이성과 덕을 키울 씨앗이 있다고 했고, 그 씨앗 같은 네 가지의 마음을 설명했습니다. 측은지심과 사양지심은 그 자체로 착하다 칭송받는 마음이니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개가 저의 생각을 깨웠죠.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한 것과 착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생활에서 이 두 가지를 가진 사람의 행동양태를 봅니다. 수오지심을 가진 사람이나 시비지심을 가진 사람이나, 사회 속에서 보자면 그다지 착해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소위 말하는 '쌈닭' 이미지, 분란을 일으켜 골치아프게 하는 인간형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맹자는 어느 시대든 '착하다.'고 평가받는 행동, 즉 남이 안된 것을 보고 측은해하는 마음, 겸손하여 남에게 공을 돌리거나 좋은 것을 사양할 줄 아는 마음과 더불어 이 쌈닭처럼 보일 내용까지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씨앗이라고 말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측은지심과 사양지심은 감정이 관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수오지심과 시비지심을 일으키는 인간의 특징은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맹자는 무턱대고 감정적인 행동만 하지 않고, 이성으로서 옳지 않은 것을 배척하고 싸울 줄 아는 것까지 갖춰야 '착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덕과 이성을 골고루 갖추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잘못된 것과 싸울 준비까지 되어 있어야 착한 것이라고 했죠.

우리 조상들은 이런 가르침을 어릴 때부터 배우면서 순하게 살 되 착함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동양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저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도 섞여 있다. 하늘은 그들을 쫓아냈다. 그들이 하늘의 빛을 가릴 테니까. 그러나 깊은 지옥도 그들을 거부하니, 그들을 보고 지옥의 자들이 우쭐해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지"

                                                                                    - <신곡>, 단테, 박상진, 29쪽


서양 문화의 영원한 고전이라 할 단테의 <신곡>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함의 대명사인데 이에 복종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반항도 하지 않고)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이라는 문장으로부터 생각나는 요즘 말들이 떠오릅니다.

 "술에 술탄듯, 물에 물 탄듯", "입 다물고 가만히 살아라.", "남의 일에 왜 끼어드냐?".... 이런 말들이요.

 선함을 위해 싸우는 건 내가 다칠 수 있으니 외면하고, 그렇다고 악함에 충성하며 살지도 않는 건 단테의 말대로 '자신에게만 충실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옥 문 앞에서 단테를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는 그들의 설 곳이 없다고 말해줍니다. 선한 자들의 터인 하늘은 물론 악한 자들의 터인 지옥조차 그들에게 저승의 호적을 주지 않는 셈입니다. 삶속에서 '자신'에게만 충실했다는 것은 사실 '육체 보존'에만 정신을 팔았다는 이야기이니 죽은 후에 이들이 있을 곳은 정말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충실해야 할 '자신'은 영혼만이 남았는데, 그 영혼은 물체가 아니니 보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말 그대로 구천을 헤매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베르길리우스는 딱 잘라 말합니다.


 "이들은 죽음의 희망조차 없다."

                                                                             - 위의 책, 같은 쪽


죽음 후에 남은 일이란 영혼의 추수인데, 하늘, 연옥, 지옥, 어떤 곳에서도 '나는 알지 못하는 인간'이라 말하는 '자신만 돌본' 인간이니 죽음이라는 끝조차 제대로 마무리지을 수 없는 법이죠.

그러니 맹자가 말한 '착한' 씨앗 네 가지를 제대로 틔워내지 못하면 서양에서는 죽음조차 없어지는 법입니다.

추수되지 못하는 영혼은 곧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겠죠.

 

'착한 사람'

덕과 이성으로 새긴 이 인간형은 정말 얻기 어려운 인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 갈고닦아도 잠시의 게으름과 비겁함으로 와르르 무너지기 쉬운 평가죠.

단지 순하고 친절하고 듣기 싫은 말을 안 해주는 사람이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든 남이든 아닌 것에 대해 끝까지 싸우기까지 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착한 사람.'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자공문왈, 향인개호지 하여  자왈, 미하야.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향인개악지 하여 자왈 미가야.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불여향인지선자호지 기불선자악지.

                                                                          - <논어>, 자로 편


논어에도 같이 해석할 수 있는 말이 나옵니다.

자로는 스승 공자에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를 묻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그는 좋은 사람입니까??"

공자는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미워한다면 좋은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좋아한다고 좋은 사람이 아니고, 반대로 미워한다고 해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좋은 사람을 구별해낼 수 있는지 묻는 자로에게 공자님은 말합니다.  


"마을 사람 중 선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


좋은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좋아하겠죠.

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고 공자님은 말합니다.

조금 의문이 듭니다.

나쁜 사람이라도 순하고 착한 사람을 굳이 미워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여기에 숨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생략된 것 같습니다. 맹자의 2개의 사단을 생각해야만 나쁜 사람들이 좋은 사람을 미워할 이야기가 생기는 것이지요. 진짜 좋은 사람이라면 옳지 못한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니 나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할 때 사사건건 방해를 할 것이고,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을 등쳐먹으려 할 때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나섰을 겁니다. 그러니 나쁜 사람들 눈엣가시 같았겠죠. 당연히 미워했을 것이고요.


착한 사람은 바보 같다고, 진짜 착한 사람은 골치 아프고 사납다고 불리는 사회에서 제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층의 뜻이 버티고 있는 인생 길잡이의 빛이 흐려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좀더 좋은 세상이 되어서 착한 사람이 행복하고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착하게 산 사람들 말고,

환경에 의해 착해진 사람들 말고,

무릅쓰고 견뎌서 착함을 지킨 사람들이 큰 성공을 이루며 자꾸 덮이는 길잡이의 먼지를 닦았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더 책을 읽지 않은 이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착함의 진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고되고 피곤한 '착한 사람'..

마을의 대다수가 착한 사람인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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