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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an 10. 2020

마음의 그네

-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

더 이상 내 모국어라 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자면,
이 눈은 카니크다.
커다랗고,
거의 무게 없는 덩어리가 되어 내리는 결정체가
흰 서리로 부서져 땅을 한 켜 뒤덮고 있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박현주 역, 마음산책, 13쪽

           

덴마크 여인 스밀라처럼, 혹은 그린란드인처럼 수많은 단어를 갖고 있을 만큼 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눈이 많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눈을 다양하게 기억하지요. 눈이 오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면 우선 눈을 아름답게만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만들어 눈부신 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떡처럼 잘 뭉쳐져 보기만 해도 탐스럽게 쌓이는 함박눈도 녹고 말지요. 그렇게 되면 어떤 풍경이었든 추레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얀 것 위에는 작은 티가 유난히 거슬리고, 일단 더러워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지요. 눈이 덮어버렸던 쓰레기 더미, 푹 패인 웅덩이, 깨진 연탄, 굴러다니던 돌멩이, 날카로운 모서리도 조금씩 원래 모습대로 나뒹굴고 꽝꽝 얼어있던 땅들은 질척거리며 사람들의 발길을 더디게 합니다.

 어른들이 가장 좋아하는 눈은 흩뿌리다가 땅 위에 내리기 전에 녹는 눈이었습니다. 그런 눈들은 작은 솜 덩이나 흰 나비처럼 팔랑팔랑 자유낙하하다가 어느새 사라지곤 했지요. 그런 눈이 아니라면 귀찮아했고 그래서 눈이 녹을 즈음을 반겼지요. 겨울 가뭄만 아니라면 말이에요. 저도 그 이유는 알 것 같았습니다. 눈이 쌓이면 길이 얼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교통사고 뉴스가 들려왔으니까요. 그 뉴스 속 사고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어서, 눈이 녹을 즈음에는 왠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곧 사라질 눈 때문에 사라진 사람들이라니......."


이제는 인간의 백 년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하루 혹은 길게 일주일이면 녹을 눈에 비해 인간은 영생이라도 사는 듯 느껴졌던 시절의 허무였지요.

      

눈 많은 마을의 어느 아침


 어린 시절의 깨달음이 인생을 살면서 가끔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가령, 하고 싶은 일은 놓을 수 없어 바쁜데 해야만 하는 일은 하나도 없어 허기진 채 절벽 끝을 까치발로 걷던 시절이나, 영혼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온갖 날 선 말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인생 전체에 진눈깨비가 내린 듯 꽝꽝 얼어붙어버렸던 시절... 누구나 걸어왔거나 지금 걷고 있을 그런 시절 말이에요........

앉을 곳도, 앉을 여유도 없어 홀로 구석에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옛 시절에 올려다보았던 별이 시간 차를 두고 제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었어요.


 "곧 사라질 시간 때문에 사라지려 하다니......."  



빙판길이 햇살에 멀쩡히 마른 길이 되는 것처럼, 인생도 어느 구간에는 녹을 것 같다는 생각에 넘겼던 시절이 꽤 있었습니다. 뭔가, 희망이라기 보다는 허무할까봐서요.... 억울하고 웃길 것 같아서 말이죠. 저는 이런 요령들로 그런 시절들을 지나쳐갔지만, 다들 절벽끝에서 되돌아가게 하는 목소리나 그림들이 몇 개씩은 있으시죠.

그런데 부적도 너무 오래 갖고 있으면 너덜너덜해지고, 주문도 너무 오래 쓰면 효력이 없어지는 모양이에요. 우리가 견디는 시간들이 그렇게 견딜 만큼 짧지만은 않으니까요. 끝이다 싶으면 더 깊이 내려가는 까마득한 바닥이 기다리고 있어서 어느 날은 바닥을 파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죠.

절망의 끝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것 만으로 우리의 손에 희망이 공짜로 쥐어지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은 더 커집니다. 인생은 어떻게든 잘 될 거야, 라는 어릴 때의 근거없는 낙관....... 그걸 되찾을 날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죠. 그러기에는 어둠 뿐인 것만 같은 인생의 예가 너무 많아서요.

어릴 때, <플란더스의 개>의 네로는 허구라고 애써 외면했는데, 세상에 고흐 같은, 카프카 같은, 천상병 같은 인생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고생하며 외롭게 살다가 사라져 간 무명 씨들이 저 하늘의 별보다 많다는 것도 곧 알게 되고요.

인간의 인생이 해피 엔딩 없이 캄캄하게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여러 예들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인생은  우리에게 아무 사정도 봐주지 않고, 세상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없다는 생각이 들죠.  참 많이 외롭고, 나아가 미움받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미움을 받기도 하죠. 사람이 어찌 잘하고만 살겠어요?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느낌에 우리는 출렁입니다. 남들의 시선쯤 나몰라라 할 만큼 강철같은 영혼이, 있을까요? 있다면 얼마나 될까요?

 저 역시 그 마음으로 인해, 자주 마음이 출렁거렸습니다. 하늘로 솟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그네처럼 높아진 고양감과 급강하하는 자존감에 인생을 내던져두기도 했지요. 정신없고 괴로워하면서 제발 이 출렁임이 멈추기만을 바랐는데, 생각해보니 다들 마음은 그런 그네를 태운 채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올라갈 때는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달콤한 말들에 황홀해하다가, 밑으로 떨어질 때는 비난하는 소리만 송곳처럼 쏟아져서 아프다고 울곤 했지요. 그래도 그네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결코 떨어지거나 결코 승천하지 않을, 인생이라는 중심축에 꽉 묶인 회전운동이라는 점을 많이들 잊고 있었어요. 놀이터에만 가도 꺄르르 꺄르르 그네 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말이에요. 위로 올라가거나 밑으로 떨어지거나, 아이들은 백퍼센트 즐기기만 하지요. 중심이 튼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깊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 낙차를 즐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마음의 그네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생각은 저만 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기원 전 5세기 사람들도 마음의 그네를 힘들어해서, 공자님께 이런저런 것을 여쭤봤더라고요.



子貢問曰 鄉人皆好之,何如 子曰未可也

鄉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鄉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중략)
 ...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 <강의>, 신영복, 돌베개, 190~192쪽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그러면 나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리 없지요. 그 반대는 당연하고요. 마을의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타인의 무관심이나 비난에 위축되는 자신을 똑바로 세우면 그 다음에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뜻이나 대상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마음의 그네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마음의 흔들림이야 늘 그런 것이고요...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중략)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중, 세사르 바예호


레온 박스트


그리고 인간은 어쩌면 사람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사랑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파리에 갔을 때 고흐에 대한 오해를 푼 다음에 든 생각입니다. 파리의 오르셰 미술관, 고흐의 방에 가서 직접 그의 그림을 봤을 때의 일이지요. 어쩌면 새로운 오해를 갖게 것인지도 모릅니다.저는 세상에 천국이 존재한다면 방이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종류든 기쁨으로 충만한 곳의 이름이 천국이라면 말이예요. 단 한 사람의 그림으로 만든 천국이라니... 엄청난 힘을 가진 예술가의 능력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방이 고흐의 방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인쇄된 책이나 도록으로는 없는 고흐의 때문이었습니다. 색을 순간, 그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예술가라는 것을 알았지요. 슬픔은 그림 속에는 없었습니다. 슬픔은 그림 밖에 있었죠. 불행한 예술가의 대명사가 아니라, 특별한 눈을 가진 예술가가 바로 고흐였습니다.

그 방에서 저는 더 이상 고흐를 안쓰러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보석은 다양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요. 한 점도 팔리지 않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오해를 받았고, 외로움에 사로잡혀 스스로 총을 쏘았지만 즉사하지도 못했던 한 인간은 타인의 눈에는 불행한 인생일 뿐이었겠지만, 그는 평생 타인 만큼의 기쁨은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세상의 아름다운 색이라는 기쁨 말이지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약속된 땅도 없으며 약속된 별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천번 씩이나

우리의 수레를 끌어야 한다는 것을.

천번 씩이나 우리의 은신처를

새롭게 세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받게 되는 것은

배급도 임금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었던 제목도 알 수 없는 레온 펠리페의 시 한 구절은 처음에는 슬픔과 외로움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시지프스의 삶은 우리의 숙명이지만,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알고 있지요.


"우리는 당신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신이 누구든 간에, 우리는 그 만한 기쁨과 그 만한 슬픔을 고루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것 같고요.


레메디오스 바로, <천체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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