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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an 17. 2020

이곳에 살기 위하여

- 어떤 내몰림들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나의 방에서 어둠은 떠나지 않는다. 
나의 눈이 폐허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나의 눈은 어둠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유일한 자유의 공간은 내 마음 속 깊은 곳 
그것은 죽음과 친숙한 공간 혹은 도피의 공간

                                                             - <이곳에 살기 위하여> 중, 폴 엘뤼아르        


강한 것은 물론이고 약한 것이라도, 알레르기는 좋은 증상 같지 않습니다.

어폐가 있네요. 병이라고 불리는 것 치고,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민함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레르기를 일으킨 후에는 그를 마주칠 때마다 반응을 보이듯이, 마음도 그래서요. 한번 마음을 앓고 난 후에는 그 비슷한 것들만 보아도 같은 증상이 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장례식 장면이나 가족이 아픈 장면이 나오기만 하면 채널을 돌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각종 재난이나 사고 장면을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심하든 심하지 않든, 누구나 한두 가지씩 그런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건드려 마음 깊은 곳을 발갛게 부어오르게 하는 상처나 슬픔들이요. 상처에 아파하고 슬픔에 겨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는 그 모든 것이 특수해보이기 마련이죠. 상처에서 조금 회복될 즈음, 나이도 좀 차면서는 인생에는 다양한 고통이 있고 그 원인들은 제각기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거리를 둘 수 있게 되면, 그러니까 좀 더 살 만해지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냉철하게 사회를 노려보다 보면 그 원인이 하나이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입니다.

무엇을 살 수 없는 가난 말고, 존재 자체를 흔드는 가난.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동물은 먹이가 없으면 굶주리다가 죽지만,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정도가 되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고요.  

 일단은 배를 달래두는 것이 문제였다. 또 다시 게우고 말았다. 나는 화가 나서, 사납게 고기를 물어뜯어서 억지로 삼켜버렸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주먹을 쥐었다. 할 수 없는 심정에 거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 되어, 무엇에 혼을 빼앗긴 사람같이 뼈다귀를 물어뜯었다. 나는 뼈다귀가 눈물에 젖어 더러워질 만큼 울고는 토하다가 저주하다가는 다시 뜯었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울었으니 또 게우고 말았다. 나는 큰 소리로 세상의 모든 권위를 저주했다. 
                                               - <굶주림>, 크누트 함순, 김남석 옮김, 범우사, 166쪽   

 크누트 함순이 <굶주림>을 써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인용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문 사회면에 인용할 기사가 너무 많아 고민을 해야 했을 테니까요. 

   

그 기사들을 인용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괴롭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가난의 결과를 담은 기사들이 철저하게 '타인의 이야기'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40대 가장을 둔 모씨네 한 가족, 지병을 앓고 있는 모녀, 몇 년 째 홀로 살고 있던 어떤 노인, 사채빚에 허덕이던 30대 가정주부, 해고된 노동자 모씨의 유가족.......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타인들이 '가난' 때문에 존엄성을 잃었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사를 읽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슬픔, 안타까움, 동정심....... 아마도 한 가지가 더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느끼고 있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그 감정은 바로 '불안'이지요. 그 '타인'들과 같은 사회에 살았던 우리들이 서 있는 곳이 결코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발 한 번 삐끗하면 우리 역시 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이 공연한 불안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많은 통계가 말해주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기사를 인용하지 않은 이유는 '불안'을 피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사들이 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기사 속 '타인'들과 기사를 읽는 '나'의 차이가 단지 운 뿐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하는 기사는 우리를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죠. 사자들의 사냥 계획에 휩쓸린 영양떼처럼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지 못한 채 사자의 의도대로 몰려다닐 뿐입니다. 패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약하고 운 나쁜 놈부터 사자의 먹이가 되고, 사자의 배가 불러야만 잠시 평화로운 시기가 돌아오지요.  그 숫자가 압도적인데도 다함께 불안을 떨쳐낼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영양처럼 사회는 아주 세고,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 각자 도생해야 한다고 아주 처음부터 그렇게 길들여졌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영양처럼 제 새끼조차 지키지 못합니다. 아주 쉽게 사자의 먹이로 내어주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디든 있는 청소년 자살, 그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삶에 대한 사랑을 본능으로 가진 아이들이 죽음을 생각하는 부자연스러운 병은 바로 후기자본주의의 불안에서 전염된 것이라고 말이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줄세우리가로 생각합니다. 임신을 한 순간 부모들은 유치원 입학 후보명단에 태명을 올려야 한다고 하죠. 영어유치원이나 사립초등학교를 보내는 부모들은 아이의 영유아 시절부터, 중고등학교는 대학을 목표로 아이들은 줄을 서야 합니다. 천진난만하고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이란 옛날 이야기 속에나 나올 뿐,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각자 자신의 줄을 알고 있죠. 


  시로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아니 그 전부터 쭉,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열등한 아이’인지도 모른다.

'열등한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수한 아이‘가 될 수 없고, 자라서 ’열등한 어른‘이 될 게 뻔하다. 

아버지도 엄마도 어릴 때 ’열등한 아이‘였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열등한 어른‘밖에 되지 못한 것이다.

‘열등한 아이’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데, 이를테면 싸움을 잘 하는 아이나 사람을 잘 웃기는 아이는 제법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특기도 없고 성깔도 없는 아이는 열등한 아이들 속에서도 들볶여서 바보 취급을 당한다. 

그런 최악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자기보다 조금 나은 무리에게 알랑거리며 부하가 되는 길뿐이다.

                                                    -<우리는 바다로>, 나스 마사모토 지음, 이경옥 옮김, 보림, 91쪽


<우리는 바다로>는 우리보다 먼저 아이들을 줄세우기 시작한 일본의 교육 현실을 냉정하게 그린 소설입니다. 줄 맨 끝의 아이 시로는 우리에게 아이들이 얼마나 예민하게 이 사회를 파악하고 있는지 알려줍니다. 어른들이 들키고 싶지 않은 이 사회의 맨 얼굴을 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내용에 대해 '하지만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어른들이 더 불안해하고 있죠.  이 사회에 시로의 인식을 바꿔줄 만한 대안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우수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성적을 체크합니다. 

 희망을 찾아내려고 시도를 하는 것은 언제나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아직 어린이다운 가슴을 갖고 있기에 속속들이 썩어버린 이 사회를 반항어린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는 것이지요. 시로와 사토시와 구니토시 등은 어른들이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매립지에서 배를 만듭니다. 몇 번의 실패를 겪으며 아이들은 가치전도를 경험하는데, 이것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자극이며 희망이 됩니다. 공부와 돈이 전부였던 어른의 세계에서 결코 ‘우수한 아이’가 될 수 없었던 시로는 배 만들기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자신감을 회복해갑니다. 하지만 변변한 도구도 없이, 아이들이 만든 뗏목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요. 결국 폭풍이 불어닥치며, 뗏목은 부서지고 맙니다. 아이들은 뗏목에 심드렁해지지만, 단 한 사람 시로 만은 열정이 식지 않습니다. 폭풍이 부는 바다에서 마지막까지 시로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배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로>는 희망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어린이들이 바다를 꿈꾸지만, 어떤 세대의 어른이라도 아이들이 혼자 만든 배를 갖고 항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꿈꾸는 아이들은 어른과 싸울지언정, 결코 그 허술한 배로는 바다로 나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로는 달랐습니다. 누구도 시로만큼 진지하지는 않았죠. 이 사회의 쓰레기가 모이는 매립지는 한때 놀이터일 뿐, 아이들은 다시 시험에 따라 반의 색깔이 바뀌는 어른의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시로는 몰랐습니다. 그렇더라도 아이들은 시로가 무시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인정하게 되었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청소년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어른의 몸을 갖고 있지만, 판단력은 무시당하는 유예된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어린이 범주에서 맘 편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어른의 세계에서 가혹해질 줄 세우기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정신 차리고 기존의 가치를 배워야 합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판단하지 말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메시지 속에 이 긴긴 시간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줄 수 있는 메시지란 고작 불안이 아닌가, 자문해봅니다. 근대나 자본주의 초기에 청소년을 억압했던 어떤 이데올로기나 강요보다 더 형편없는 것을 이 시대는 나눠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로운 질서는 기술 축적에 필요한 일정한 시간과 연륜이 개인에게 직장 내에서의 입지 확보와 권리를 부여해준다고 보지 않으며, 대신에 실질적인 면에 가치를 둔다. (...) 많은 산업 사회학자들이 연구해온 바에 의하면, 습득한 기술을 조직체가 완전히 소화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시간의 경과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도 꼭 필요하다. (...) 모험을 감핸하는 시간 틀은 늘 인간을 편치 않게 했다. 시간에 대한 개인적 고뇌는 신자유주의와 깊이 얽혀 있다. "뉴욕타임즈"의 한 필자는 "최근 일에 대한 불안이 도처에 침투되어 자신의 가치를 희석시키고, 가족을 흩어지게 하며,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작업장 내의 유기적 관계를 변질시키고 있다"고 적었다. (...) 두려움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불안이며, 불안이란 지속적인 위험을 강조하는 환경 속에서 생겨나며, 또 불안이란 과거 경험이 현재에 아무런 가이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증가한다.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 , 리처드 세넷, 조용 옮김, 문예출판사, 137~139쪽


사실, 그것은 어른들 개개인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때문이지요. 이윤 극대화가 목표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어른들이 느끼는 불안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른은 어른이기 때문에 불리합니다. 경력이 쌓일수록 불리하고, 경험이 많을수록 일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된 어른은 차마 원래부터 금수저인 인간만이 이 불안을 떨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망이라는 말과 같으니까요. 그래서 학력이나 뛰어난 능력으로 희귀하게 성공한 케이스 하나를 모델 삼아 자신의 자식에게 희망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이죠. 금수저는 아니지만, 저렇게 될 수 있다고 말이지요. 금수저는 1%이고, 99%의 영양떼들이 전체가 나아갈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탓입니다. 그것도 어른들 탓은 아닙니다. 단지 1%이지만, 전 세계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절반 이상을 그 1%가 가지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자주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기사 속의 타인들은 불안을 야기하는 '남'이 아니라, 그 물음에 답한 '우리'일 뿐입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민음사, 15쪽

 그리고 이 휘황찬란한 세계에서 아닌 척 하고 싶지만, 결국 우리 인간을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세우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가난, 그 중에서도 먹는 문제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는 아직 운이 좋을 뿐입니다. 이 세계의 절반 이상이 굶주리고 있고, 먹지 못하는 인간에게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일 믿어지지 않는다면, 먹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 전 세계를 다닌 헨미 요의 책을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음식을 받으면 뭔가에 취한 듯 눈동자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을 놓지 않을 것 같다. (중략) 하지만 이상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먹는다는 것이 삶과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나는 요 며칠 사이에 디카에서 확인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이치를 깨달았을 때 내 혀는 공포에 질려 딱딱해지고 위장도 작은 돌멩이처럼 쪼그라들어 버렸지만.
      -<먹는 인간>, 헨미 요, 박성민 역, 메멘토, 33~34쪽


세계 최빈국으로 유명한 방글라데시, 그곳에서도 가난한 디카에서의 먹는 일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먹이를 먹어야 사는 인간이 그것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읽다보면, 우리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짐승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먹는 법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도 가끔 짐승과 똑같이 '먹이를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은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을 뿐이다.
-위의 책, 35쪽


우리의 문명이란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기 위하여 발전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문명이란 우리의 존엄성을 확인시켜주는 무엇이며, 그래서 때로는 배가 고프더라도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음식 대신에 선택하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 읽었던 <플랜더스의 개>에서 넬로가 친구 아로아의 초상을 팔지 않았던 것처럼, 도둑으로 몰리면서도 돈 주머니를 주인에게 찾아주었던 것처럼 말이죠.

 또 얼마 전 우연히 읽었던 어떤 sns 메세지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학생이 한 달에 한 번 피자를 먹는 기쁨을 포기한 채 누군가의 음반을 샀다는 것처럼 말이죠.......  

인간은 실은 이렇게 발전해 온 존재이기 때문에,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못 먹게 된 상태가 되면 그 반대로 존엄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불안에 떨고만 있는 것도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인간도 잊혀지지 않으며 
어떠한 어둠도 투명하지 않다. 

나홀로 있는 곳에서 나는 많은 인간을 만나며 
나의 근심은 가벼운 웃음으로 깨어지고 
엄숙한 나의 목소리에 뒤섞여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내 눈은 순수한 시선의 그물을 유지한다. 

우리는 험난한 산과 바다를 지난다. 
미친 듯한 나무들이 맹세한 내 손의 길을 가로막고 
방황하는 동물들은 생명을 산산조각 내어 나에게 몸을 바친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의 영상이 풍성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연과 거울이 흐려진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늘이 비어 있다는 것이, 
나는 외롭지가 않은데.

                  - <이곳에 살기 위하여> 중, 폴 엘뤼아르

 


1952년에 나온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도 소년이 나옵니다. <우리는 바다로>에 나오는 시로 보다도 훨씬 가난하고 못 배운 소년은 바다에서 돌아온 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께 배울 게 많으니 어서 빨리 나으셔야 해요. 그래서 저한테 모든 걸 다 가르쳐주셔야 해요. 

대체 얼마나 고생하신 거예요?”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문학동네 131쪽


 <우리는 바다로>의 소년들은 이 소년보다 겨우 28년 후의 세계에 살았습니다. 그 28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바다에 대한 불안을 늘어놓는 어른 말고, 뗏목을 묶는 방법, 폭풍우 치는 밤을 함께 지켜줄 노인은 어디로 간 걸까요? 노인의 평생 교훈을 쓸모없고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쓰레기 매립장으로 갖다버린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노동을 통해 이익을 내는 인간이 아니라 단기 이익으로 천문학적인 차익 숫자를 내는 것이 중요한 자본 덩어리들 말이죠. 하지만 문명을 통해 존엄성을 키워온 인간은 바다의 교훈을 갖고 있는 노인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더 이상 내몰리지 않고, 불안을 증폭시키는 기사를 차단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함께 노인이 되어가면서 같이 가치를 배우고 전승하는 사회가 가장 약한 영양을 노리는 이 불안을 멀리 쫓아버릴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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