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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Apr 05. 2020

코로나19가 알려준 것

- 우리 모두가 건강해져야 끝낼 수 있는 병

어느 날, 중국 발 뉴스로 코로나19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이러스는 죽음을 무기삼아 사람들을 위협했고 일상을 헤집어놓았죠. 이렇게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생길 때,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히어로 영화가 많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죠. 사실, 영화라는 것이 발명되기 전에도 영웅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길가메쉬는 인류 최초의 나라를 세웠고, 헤라클레스와 같은 신화 속 영웅들이 괴물들을 처치했으며, 단군할아버지는 바람과 구름과 비를 부릴 줄 알았죠. 그리고 영화의 시대가 되자 슈퍼맨부터 어벤져스 군단까지 지구가 아니라 우주 전체를 구하고도 남을 영웅들이 즐비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필적할 적이 있고, 영화 속에서조차 우리를 완벽하게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요.


어벤져스와 그 적들, sbs 뉴스


 현실에서 우리를 구할 것은 영화 속에서 엑스트라는커녕 점처럼 그려진 일반인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영웅을 원합니다. 이 또한 오래된 습관이지요. 그리스 시절, 아니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수메르 시절부터 말이에요. 우리는 그 시절부터 누군가의 뛰어난 능력에 지나칠 정도로 감탄을 했으니까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처럼 말이죠.


<토끼와 거북이> , 보림출판사


 낮잠자는 토끼가 아니라 성실한 거북이가 승리하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런데 삐딱하게 생각하면 도대체 왜 체급도 다른 두 선수가 같은 레인에 섰는지 설정부터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더 현실적인 승부 이야기죠. 현실이야말로 체급을 나누어 경기를 치르지 않으니까요.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든 똑같은 경기장에 섭니다.

 "아니꼬우면 너도 능력을 키워!"

 "열심히 노력해!"

 "최선을 다하면 성취할 수 있어."

개인 능력에 대한 숭배는 아마도 그래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체급이 무시되는 현실에서 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은 능력뿐이니까요. 하지만 이 사회에서는 능력만으로도 성공하기 힘듭니다. 이기려면 거북이와 같은 성실함도 필요하죠. 그래서 왕후장상,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가 대다수인 평범한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능력과 성실'이라는 교훈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죠. ‘토끼와 거북이’는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아무 것도 없는 개인이 그나마 이길 수 있는 노하우에 대한 우화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능력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성실합니다. 성실함 없이 능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죠.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실한데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기가 어렵죠. 왜냐하면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타고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다 타고난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 중에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능력이 따로 있기도 한 데다 평범한 집안이라 하더라도 그 능력을 키워줄 환경이냐 아니냐는 차이가 능력의 밑거름이 되는 일도 허다하니까요.

다시 토끼와 거북이로 돌아가서, 이 달리기 경주의 두 번째 게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북이는 이번에도 성실함으로 이길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거북이가 아무리 성실하다 해도 토끼가 낮잠을 자지 않는 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죠. 두 번, 세 번, 네 번....... 아무리 해도 거북이는 토끼를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거북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하고 패배자로 살거나, 토끼에게 아첨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이기려고 방법을 찾거나 했겠죠. 만일 거북이가 승리를 포기하고 토끼의 능력을 숭배하기로 했다면, 거북이는 토끼가 자신의 일을 해결해주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을 바라는 심리가 바로 그렇죠. 그런데 토끼는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칭찬에 우쭐할 수 있겠지만, 숭배가 계속되고 그것이 당연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군인이나 시민 중에 나를 대체할 사람은 없다.
(...) 제국의 운명은 오로지 내게 달려있다.”
(중략)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기 자신의 삶의 시간에 맞추겠다는 결심이었다.
      
-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돌베개, 54쪽

 믿어지지 않지만, 1930년대 후반의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영웅이었습니다. 진짜였든 가짜였든 그 뛰어난 능력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하고, 평범한 자신들의 어설픈 노력과 힘으로 시스템을 만드는 대신 찬란해보이는 영웅에게 운명을 맡긴 공동체는 자신이 곧 국가라는 망상을 가진 독재자로 인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히틀러에 대한 주석>, 돌베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이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 소설, 전설, 신화, 우화......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의 교훈은 그저 믿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재미를 위해서는 한 사람을 비인간적인 이상형으로 만드는 것이 편하니까요. 현실이라는 날카로운 검증의 칼에 베어보지도 않은 채 그 허구의 교훈을 믿으며, 현실의 누군가를 쉽게 이상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도 누군가에게 쉽게 맡겨버려서는 안 되죠. 이야기의 교훈을 믿으려면 허구에서 생겨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진 교훈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낫습니다. 가령 미국 노예시절 흑인들 사이에서 생겨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같은 데서 나온 교훈 말이죠.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나온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이솝이 주최한 경주 이후 두 번째 경주처럼 보입니다. 토끼가 경주를 위해 열심히 훈련하고 화려한 운동복도 준비하거든요. 그에 비해 거북이는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원작 속의 성실함조차 보이지 않죠. 하지만 결과는 역시 거북이의 승리.

어떻게 이겼을까요? 그 비결은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거북이 가족에게 있습니다. 거북이 가족 일당이 전날부터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곳곳에 숨어서 토끼를 앞섰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비겁하다고 거북이를 비난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기에는 좀 당황스럽겠죠. 하지만 우리가 흑인 노예였다면, 아마 아이들에게 거리낌없이 읽어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예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이었으니까요.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 된다며 멸시 당하던 흑인 노예의 삶속에서 만들어진 토끼와 거북이는 이렇게나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거북이의 경주는 앞서 말했듯 말이 안 되는 불공정 경주였죠.     


부지런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하지만 거북이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가족과
상대를 앞지를 수 있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거북이 같은 사람들은
단결해서 지혜를 짜내 강자를 앞질러야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모럴moral입니다.
 
-<타는 태양 아래서 우리는 노래했네>, 웰스 게이코 지음, 유은정 옮김,
돌베개, 41쪽


 

 

 세상을 살다보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조건이나 상황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믿을 만한 사람도 없는 그런 일들이 있죠. 코로나19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도 그런 어려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죠. 어느 한 나라, 어느 한 계층, 어느 한 민족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전 세계로 동시에 퍼졌다는 점에서요. 먼저 겪은 사람도, 여유가 있는 사람도 없이 동시에 위험에 처해 모두가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잘 해나가고 있는 편인 것 같습니다.

 불편함이 많지만 다른 나라를 향한 문을 닫아걸지도 않았고, 어떤 지역을 봉쇄하지도 않았으며, 공황상태에 빠져 생필품을 사재기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빨리 사태를 맞이한 터라 이러한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후에 다른 나라를 보며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죽음의 위협 앞에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은 모든 생물의 현상이고, 이때는 생존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의연할 수 있었을까요? 제대로 된 정보와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 덕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안전지대나 위험지대도 없이 한 마음으로 이겨낼 수 밖에 없다는 믿음.......

전염성이 강하다는 이 바이러스는 우리를 많이 위축시켰지만, 반대로 냉정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내가 단지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전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의식하며 행동했죠. 그러고 보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요구한 조건은 의미심장했습니다.


나 혼자 건강하면 끝인 병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건강해져야 끝낼 수 있는 병.


다행히 우리는 소유 주체가 분명한 남편과 아내 앞에도 ‘우리’를 붙이는 사람들이니, 움직일 때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요. 꼭 건강의 위협이 아니라도, 우리 중 누군가가 불행해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재기 때문에 서로 싸우던 그 누군가도 인류 전체가 사라지고 자신만 살아남는다면 행복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민권은 내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인데,
거기에는 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본질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인간 및
 다른 존재들의 광대한 커뮤니티의 실원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비통한 자들의 정치학>, 파커J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76쪽


2020년...

SF영화에서 단골로 나왔던 미래의 어느 해...


호주산불과 코로나19,

미래의 시작을 우리는 재난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둘 모두 한 나라의 탓으로 일어난 재앙이 아니었다는 것과 몇 나라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체하고 있지만, 기후, 해양쓰레기, 대량 멸종 등 지금 현재도 지구적 재난은 진행 중에 있습니다. 

 호주 산불 때도 우리는 지구인으로서 연대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산불은 호주라는 대륙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게는 너무 멀리 있었죠.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대륙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의 단결력을 시험하기라도 할 것처럼 기세등등하죠.


이 좋은 봄날에 조용히 집안에서 끔찍한 세계 뉴스를 보고들으며,

파커 J 파머의 책에 실린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시를 가슴에 새겨보는 이유입니다.


위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모두 손을 잡네.
그리고 걸어 올라가네.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내버려두는 것
잘 들어,
우리를 둘러싼 땅은
그렇게 하기엔
위험할 만큼
너무 넓다네.  



마티스,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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