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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Dec 23. 2019

흔들렸던 네 덕분에 세상은 살만해.

- 죽고 싶은 너에게 <데미안>을 핑계로  쓰는 솔직한 편지

감히 말하는데,

난 <데미안>을 제대로 읽을 10대는 1/1000 이라고 생각해. (0의 숫자를 줄인 나의 소심함..)

나는 데미안을 스무 살에 읽었어.

그리고 짧고 뜨거운 때늦은 사춘기를 겪었지. 한 일주일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잖아?

자연처럼 멋진 예술도 마찬가지야. 예술에는 책도 들어간다는 것을 좀 알아줘.

<데미안>은 말하자면, 자연이야.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몇 가지의 맥락이 필요해.


1. 청소년에 대하여

2. 사춘기에 대하여

3. 인간의 성장 발달에 대하여

4. 가족의 정치적 의미에 대하여

5. 남자답다는 의미에 대하여

6. 서양 문화에 대하여

7. 기독교와 서구문명에 대하여

...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몇 가지 감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해.


1. 수치심

2. 경외심

3. 두려움

4. 머뭇거림

5. 절망

6. 고뇌

7. 죽고 싶음

....


오해하지 말기를..

책을 읽지 말라는 말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

이 가운데 단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꼭 읽어봐.

아는 만큼 보인다잖아?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감정에 대한 이해가 많아지면,

기특하게도 공부라는 걸 좀 해서 지식이 많아지면,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보고 "짜식~" 하고 말할 날이 올 거야.


심지어 데미안에 대해서도 그럴 날이 올 수도 있지.  

헤르만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주인공 이름이지)라는 필명으로 이걸 썼어.

그런데 언제 썼는 줄 알아?

1919년. 

작가는 1877년 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마흔셋에 이 '청소년 소설'을 썼어. 게다가 주인공 이름으로 발표했지.

이를 통해 우리는 조금 짐작할 수 있어.

이 소설은 자신의 경험이 엄청엄청 반영된 소설이며, (더 중요한 건) 이걸 이렇게 쓸 수 있을 때까지 무지무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거.

쓸 수는 있었지만, 마음에 남은 그 무엇까지 다 해결되었을까?

난 덜 해결되었을 거라 생각해. 주인공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점에서. 

그런데 왜 주구장창 책 얘기만 하느냐고?

저 제목은 뭐냐고?

 

싱클레어를 읽어보라는 거야.

열여섯에서 열아홉까지... 데미안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1/1000이야.

좀 착한 애들은 "와~~~" 하면서 감탄할 테지만,

센 척 하는 애들에겐 "뭔 개똥철학!" 일 거라 생각해.

사실 "와~~"하는 애들이 훨씬 미래가 밝지.

이해할 마음이 있고, 자기가 매혹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가 돋보이기 때문에. 


하지만 어떤 마음이든 읽어봐.

데미안의 이야기가 당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말이야. 

싱클레어는 죽기 바로 직전에 데미안을 만나.

싱클레어를 죽음 직전까지 내모는 건 바로 폭력이야.

지금으로 치면 '학교폭력'. (학교는 많이 안 나와도)

프란츠 크로머라는 개자식이 이 착한애를 괴롭혀.

무고한 싱클레어를.. 

싱클레어에겐 희망이 없지.

부모를 생각하면 복잡해서(짜증, 몰이해, 죄책감, 회개, 두려움, 외로움....),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지만

밖은 프란츠 크로머의 세계야.

어느 곳에서도 숨쉴 수 없어. 

절망 속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나게 되지.

나이 몇 살 많은데 아는 것도 많은 데미안.

프란츠 크로머를 제압하고, 더 이상 따뜻하거나 안전하지 않은 싱클레어의 균열된 세계를 살 만한 곳이라 용기를 주는 데미안. 

책 읽는 맛의 최고는 "동일시"지.

싱클레어와 동일시하며 읽었던 사람에게(그러니까 청소년에게)

이 책은 종종 절망감을 안겨주기도 해.


"왜 내게는 데미안 같은 존재가 없을까?"


스무 살에 읽었던 나는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지금 쓰면서 생각해보니 데미안은 애초에 없었던 것 같아. 

힌트가 책에도 있었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싱클레어가 알 속의 새였다면, 그 알에 데미안이 있을 자리가 있었을까?

좀 살아본 결과, 없었으리라 믿어. 

나중에 싱클레어는 데미안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는데,

스무 살 때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도 이젠 알겠어.

애초에 데미안은 싱클레어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헤르만 헤세도 마흔이 넘어서야 그것을 정리하고 쓸 수가 있었겠지. 

싱클레어는 알 속의 새이고, 데미안은 바로 막 알 밖으로 나온, 날개가 채 마르지 않은 새라는 것을...

인간은 누구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압력을 견딜 수 없는 시기가 온다는 것을 정리할 수 있었을 거야.

다만, 모두가 알을 깨는 것은 아니고,

알을 깬다 해도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갈 수 있는 것은 소수라는 것도 알았겠지.. 


프란츠 크로머라는 무서운 세계,

너무 환하고 밝아서 나의 절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가정이라는 세계,

둘 사이에 끼어서 압사당할 것만 같은 싱클레어. 

청소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나이의 사람들이 '압사당할 것' 같은 시기를 지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말했잖아.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고.

알이 깨질 때, 새들도 시끄럽게, 두렵고 아프게 껍질을 깨고 나오지.

인간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태어난다고들 해. 

그러니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내가 알던 세계가 깨질 때 통증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물론 세상에는 그저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

알을 깨지 않는 사람들.

알이 너무너무 커서 깰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있어. 깨다가 다시 돌아간 사람들도 있지.

혹은 깨질 때도 안 된 사람들 알을 부숴 자신의 알을 넓힌 뒤 들어가버린 인간들도 있어.

그런 사람들 이름은 밤새도록 말해줄 수 있어.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반드시 알을 깨야해.

새로 태어났는데, 세상은 한번 날아봐야지. 그래야 새지.

그런데 알은 공짜로 깨지는 게 아니라는 거.

남이 해주면 날 수 없어. 그것만은 사실인 것 같아. 

싱클레어가 어떻게 데미안이 될 수 있느냐고?

데미안이라는 이름은 데몬, 악마라고 하는데 그보다 초인적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거야.

인간에게는 돌파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어. 그럴 때 영어에서는 "super"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아.

슈퍼맨이라는 단어를 봐.

super(초)-man(사람).

가녀린 몸매의 엄마가 자동차 밑에 깔린 아기를 보고 자동차를 들어올렸다는 이야기는 찾아보면 꽤 많지.

그런데 이 'super'는 보통 때 나오지 않아.

엄마의 가공할 힘처럼, 정말 "끝"이라는 상황일 때,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싶을 때 나와.

싱클레어의 초인 데미안은

다시 말하면 싱클레어의 지구 최후의 날 때 만난 초자아인 거야. 


10대는 늘 아프지만, 아프냐고 묻는 어른은 많지 않아.

물어도, 사실 답해줄 수 있는 어른은 별로 없지.

잘 몰라서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어른들도 죽지 못해 살고 있거든.

그 어른들 대다수가 스스로 알을 깨지 못했거나, 아프락사스에게 가는 것을 포기했으니까.

그래도 말이야...

지금 죽을 것 같은 한 개인에게

싱클레어처럼 지옥에 있는 한 아이에게

모두 다 아프다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겠지.

위로는커녕 놀리는 말이지. 

원래 고통이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연대하여 고통의 근원을 없앨 수는 있어도

일단 고통을 당한 자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는 그 상처를 없앨 수 없어.

하지만 10대의 고통은 좀 다른 것 같아.

다른 고통과는 달라. 아주 확실히 말이야.

이겨내기만 하다면, 빛이 될 수 있지.

알을 깨는 거니까.

육체적 건강만 잃지 않는다면, 고통은..... 나중에는 성장통이라 말할 수 있는 종류가 될 수 있어. 


나는 분명히 '육체적 건강을 잃지 않는다면'이라고 말했어.

고통이 육체를 침범하려 할 때,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면 머저리야. 

누군가 때려서 죽을 결심을 하고 있다면,

죽기 전에 육체를 지킬 결심을 하라고 하고 싶어.

그 누군가가 힘이 세서 절대 이길 수 없다면, 아예 이길 생각을 하지 마.

이미 죽으려고 했는데, 싸우다가 죽는 게 무슨 대수라고?

어른들에게 일렀다가 보복을 당하거나 따돌림 당할 걱정이라면

걱정도 팔자라고 말해주고 싶어.

이미 죽을 생각을 했잖아.

죽는다는 건 다음이 없다는 말이야.

'그놈들'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나 자신'도 없어.

천국이 있고 영혼이 있다고?

개나 줘버려.

갔다 와본 사람이 있다면, 그 후에 믿어도 괜찮아.

일단 우리가 아는 건, 죽음 이후는 '없음'이라는 것 뿐이야.


자신의 죽음=지구멸망


이 말을 잊지 마.

지구가 멸망할 결심을 했는데, 왜 어른들에게 말을 못하지?

하다못해 어른들에게 '그놈들'을 감방에 처넣거나 맞은 만큼 때려달라고 말해.

후환이 두려우면 자퇴해.

학교가 생명보다 소중해?

학교를 나가도 방법은 많아.

검정고시로 위인이 된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검색해보든지.... 

따돌림도 마찬가지야.


남들이 날 따돌릴 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


"스스로를 따돌리지 말 것."


자기 스스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대단함을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스스로를 따돌리는 일이야.

절대로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짓지는 마.

자신을 지탱해준 자신감까지 사라질 때, 그때가 비로소 '그들'에게 무릎 꿇는 때야.

죽는 것은 물론이고. 


절대 죽지 마.

죽음으로 복수하겠다고?

어떻게? 그들이 감방에 가고 그들이 괴롭고 그들이 손가락질 받으니까?

죽으면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천국이니 영혼이니 사후세계니 하는 환상 같은 건 우선 제외 해.


인생 최대의 결정을 하기 직전이잖아. 

이 세상에서 나를 없애느냐 아니냐.

나의 지구를 멸망시키느냐 아니냐. 

이런 중요한 결정에 환상을 집어넣어서 뭐 어쩌려고?

만약에 환상을 갖고 죽었는데, 필름 끊기듯 '없음'이라면.

내가 나라는 것조차 사라진다면... 

그리고 죽는 걸로 복수할 수도 없어.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잖아.

내가 죽고 그들은 살아남았다고 쳐.

감방에 가고, 학교 졸업도 제대로 못하고, 성공도 못했다고 쳐.

하지만 잔인하게도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다 있어. 분노와 슬픔도 있지만,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고.

결혼할 수도 있고, 아이가 생길 수도 있어.

살아있는 한 돈도 벌 수 있고, 학교 안 다녀도 성공할 수 있어.

다른 건 다 몰라도 살아있어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있어. 


그리고 그거 알아?

그들 중 대다수는 개과천선하지도 않을 거야.

약한 사람 괴롭히던 아이가 어른이 되면 더 비열하게 약한 사람을 괴롭힐 거야.

그런 인간들이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지.

그런 인간들이 더 잘 사는 사회가 분명히 있다고. 

그들을 단죄하지 않고, 단죄하는 걸 보지 않고 그냥 죽어버리는 건

미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아.

죽는 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야. 

제발 죽지 마.

희망이 없다고?

그래, 죽을 것 같을 때까지 고민 해.

그래야 비로소 새가 되는 거니까. 알을 깨는 거니까.

스스로 알을 깨지 않는 인간 때문에 세상은 지옥인 거야.

아프고 아파서 알을 깬 인간들 때문에 이 세상이 살 만한 거야.

아팠기 때문에 남들의 아픔을 이해하니까. 

죽음에 대한 환상도 갖지 마.

사후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어.

확실치 않은 기대감으로 지구를 멸망시키지 마. 

만약 사후에 대해 기대하게 된다면,

종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봐. 

하느님이 사람을 세상에 낼 때는 목적이 있다고 하지.

그 목적을 채 이루지도 않고 돌아온 영혼을 하느님이 반가워하실까?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의 삶이 공부라면 진도가 끝나지 않았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공부가 있을까?

지금 겪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뒤, 다시 태어난다면.. 진도는 나아간 게 아니잖아.

태어나서 다시 처음부터 지금 이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면... 끔찍하지 않아?

차라리 지금까지 겪었으니까, 지금까지 고민했으니까

무엇이 되었든 마무리를 해서 진도를 나아가야 하지 않겠어? 

괴로움을 겪은 뒤,

행복하고 희망차고 따뜻한 세상이 반길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야.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다시 힘이 나는대로 바람의 무서움과 더 큰 적에 대해 알게 돼.

어른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대신 하늘이 보이지, 비로소.

알에서 짐작했던 뿌연 하늘이 아니라

날아오를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 창공이....... 

그 기회를 놓치지 마.


죽음은 끝이야

몸이 재가 되면, 너의 지구는 멸망해.

어딘가 영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영혼은 이미 네가 알고 있는 '너'가 아닐 거야.

네가 사랑했던 사람은 물론 너를 괴롭혔던 사람도, 이 세상조차도 기억에 없을 거야. 

죽기 전에 뭐든 해.

대신 상황이 변할 만큼.

네가 너의 지구를 멸망시킬 결심을 했던 것처럼,

너를 죽이려고 하는 그들의 지구를 멸망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져도 좋아.

살아.

그래야 하늘을 날 기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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