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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Dec 13. 2019

내 앞의 한 사람

난쟁이 무크가 가르쳐준 것

 언젠가 고향에서 나오는 지역 신문의 칼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어떤 학부모들에 대해 한탄하는 글이었습니다. 

오래된 마을에 새로 아파트 단지가 형성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그 아파트에 입주한 학부모들이 주택단지, 그러니까 오래된 마을의 아이들과 놀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래된 마을에 사는 아이들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파트라고 해봐야 대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가격인데, 그 학부모들은 더 비싼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보다 자신들의 아이가 더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고향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에 속이 상하면서, 그런 학부모들과는 다른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동화 <난쟁이 무크>에 나오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엑스트라였습니다. 이야기에 없어도 되는 인물이었죠. 

하지만 <난쟁이 무크>의 이야기는 분명히 한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정확히는 한 아버지가 아들을 호되게 혼나는 장면으로 시작되지요.

 

<하우프 동화> , 국민서관, 박연 삽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얘기해주지. 

그러면 너도 이제는 그 사람을 보고 웃지도 놀리지도 않을 거야.” 

-「난쟁이 무크」, 『하우프 동화』, 빌헬름 하우프 지음, 송영 옮김, 박연 그림, 국민서관, 127쪽


 아이들은 왜 혼나고 있었을까요? 

동네 아이들은 오랜만에 외출에 나선 무크의 괴상한 외모만 보고 놀리고 있습니다. 1미터가 안 되는 키에 머리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힘없는 노인은 짓궂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쉽겠죠. 그런데 한 아이의 아버지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아들을 불러 호되게 혼을 냅니다. 그리고 무크의 인생을 이야기해줍니다. 


무크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읩니다.

무크의 아버지는 아들이 난쟁이라서 한평생 숨어 살았죠. 

이웃 사람들은 고아가 된 무크를 돌보기는커녕 알아서 제 살길을 찾으라고 쫓아내버립니다. 

슬픈 상황에도 무크는 단지 새로운 시작라는 것에 힘을 냅니다. 

아버지의 유품인 커다란 옷을 볼품없이 차려입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난 무크. 

불쌍한 처지지만 어린 소년답게 희망에 차 있습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불빛이 가득한 세상 어딘가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곳이 있으리라는 믿고 있죠. 


같은 책

하지만 언덕 아래의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 일은 녹록치 않습니다. 

사흘을 굶은 무크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할머니의 집에 가게 됩니다. 

예쁜 고양이와 개는 사랑하지만, 못생긴 개나 사람인 무크는 사랑하지 않는 할머니는 무크가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야단만 칩니다. 

어느 날, 무크는 비밀의 방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장식품을 건드리고, 덜컥 겁이 나 도망칩니다. 

다 떨어진 자신의 구두를 대신할 신발과 몸을 지탱해줄 지팡이 하나를 품삯으로 챙겨 들고 말이죠. 


도망치던 무크는 신발에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는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이용해 임금님의 심부름꾼이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지팡이가 보물을 찾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물을 발견한 무크는 임금님의 총애 때문에 자신을 시샘하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에게 보물을 나누어주면 자신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보물을 나누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무크를 질투하고 임금님의 보물을 훔쳤다며 그를 모함합니다. 

무크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신발과 지팡이의 비밀을 털어놓지요. 

무크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임금님은 그를 풀어주었을까요? 

이제 임금님은 무크의 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무크의 신발과 지팡이에만 관심이 있죠. 

감옥에 갇혀 있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다 난쟁이이기까지 한 무크. 

임금님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신발과 지팡이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돈 한 푼 주지 않고 내쫓죠. 


같은 책

무크는 다시 한번 시련을 겪지만 이번에도 코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신기한 무화과 열매를 얻어 빼앗긴 신발과 지팡이를 되찾습니다. 

궁전을 떠난 무크는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제 무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지? 

무크 씨는 아직도 사람을 믿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거란다. 

무크 씨는 여행을 한 덕분에 세상일을 잘 알게 되어서, 학식도 풍부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무크 씨를 놀려서는 안 돼. 오히려 존경해야 할 사람이지.”

 - 같은 책, 154쪽


어렸을 때는 무심코 지나갔지만, 어른이 되니 무크가 갑자기 가엾어집니다.

무크는 결국 불행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무크는 늙을 때까지 사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무크의 모험이 그저 신나지만은 않게 되었지요.  

그는 보물을 얻었고 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혜도 생겼죠.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무크가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크가 원한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그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한 무리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죠. 


그러고보니 애초에 모험을 떠나게 된 것도 이웃사람들이 쫓아내서였습니다. 

성실히 일했던 집의 할머니도 그를 보듬지 않았고, 

충성을 다했던 임금님도 미쁘게 여기지 않았으며,

미워하는 사람들을 품고자 했지만, 오히려 모함을 받아 비참하게 쫓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혈혈단신인 그의 처지를 우습게 여겼고 난쟁이라는 외모로 그를 판단했습니다. 

함부로 업신여겨도 되는 존재라고 말이죠.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그 경솔함의 대가를 치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크가 행복해진 건 아니죠. ...


정의가 중요한 건, 더 이상의 슬픔을 만들지 않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것을 깨닫자, 왜 이 이야기에 아버지의 훈계가 들어가야 했는지 알 수 있었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쉬운 아이들에게 작가는 

겉모습만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러므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같은 책

 짓궂은 아이들뿐 아니라, 존경받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곤 합니다.

사실 한 사람을 아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예의를 다해야 한다고 배우는 것은, 

냉소적으로 본다면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실수할 위험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무크의 이야기를 해준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진짜 메시지는 

그러한 소극적이고 냉소적인 해석보다 더 크고 적극적입니다.



무크의 인생이 어느 누구도 겪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내 앞의 누구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다니고 있는 학교나 직장, 걸치고 있는 입성 따위로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매일 만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신비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에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무크가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아이 아버지의 말은 

그가 원했던 행복을 포기했다는 말처럼 들려 가슴이 아픕니다. 

무크가 세상에서 쫓겨나며 얻은 교훈이란 

인간이 얼마나 겉모습만 보는지, 

자신의 지위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그 무크의 이야기를 통해, 

한 사람을 알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사람을 얼마나 신중하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어쩌면 무크가 그 마을에 터를 잡은 이유는 

바로 그런 교훈을 이어나가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마을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공존하기 위해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들이 사는 마을이기 때문에 말이죠.   


마음씨 착한 무크는, 그것 만으로도 위로를 받으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마을축제>, 안나 메리 로버트슨 모제스


                                                       * 이 글은 <KOGAS> 2019년 2월호를 위해 쓴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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