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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Dec 16. 2019

내 안의 '아이'를 보듬으며

- 그림책을 읽는 마음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길에서 우연히 자작나무를 만나면 짧은 휘파람 같은 바람이 부는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을 달려온 바람이 눈처럼 새하얀 껍질과 싱그러운 초록색 잎들 사이로 스치는데, 

그 끝에 빨강 머리 앤의 수다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자작나무를 유난히 좋아했던 앤이 저를 초록 지붕집 풍경으로 데려가곤 하지요. 

하지만 “자작나무를 보면 E자가 붙은 앤이 생각나지 않아?”라고 말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비나 눈이나 구름 때문에, 

바나나 우유나 옥수수 빵이나 삼각김밥 때문에, 

혹은 홍차와 마들렌 때문에 옛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그때 마주쳐야 할 대상은 진짜 사람이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그리워한다고 고백하면 비정상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정상적인 어른이고 싶었지 특이하다는 말을 들으며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지요.   

출처: Manfred Antranias Zimmer

 불쑥불쑥 나타나는 동화 속 친구들의 존재를 부끄럼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뼈저리게 이해한 후였습니다. 

두꺼운 교양서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울긋불긋한 어린이 책을 꺼내는 일은 여전히 쭈뼛거리는 일이었지만,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즐거움에 동화책을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아마 1975년이 초판인 그 전집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을 것입니다. 

남 눈치 보는 소심한 어른이었던 내가 일부러 동화책을 사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책읽기는 제게 뜻밖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저를 잘 아는 기획자가 저의 경험을 책으로 엮어보라고 권했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한 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제목은  <성냥팔이 인문학>. 

삶이 팍팍한 어른에게도 스스로를 추스를 동화라는 인문학이 있으니, 

자신에게 성냥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죽어간 소녀처럼 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지었던 제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원고는 묻혔고, 

몇 년이 지나서야 <동화 넘어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죠. 

책 서문에는 저를 책의 세계로 이끈 ‘소년소녀 세계문학 전집’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를 썼더랬습니다. 

장사가 안 되던 여름 날, 

동화책을 갖고 싶은 딸을 외면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진열장에 놓인 이불 두 채와 전집을 교환했던 이야기였죠. 내 생애 첫 보물이 돈이 아닌 이불과 교환된 것을 알았을 때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펼쳐본 아버지는 뜻밖의 말씀을 했다. 


 “이불 얘기는 괜히 왜 했어?”


 툭 던지는 말씀에 부끄러움 같은 감정이 묻어났습니다. 

그제야 제게는 한없이 따뜻한 에피소드가 아버지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빠듯하기만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젊은 날과 

시간이 흘렀어도 사라지지 않은 부모로서의 미안함을 그제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죠. 

헤아려 보니, 이불과 동화전집을 바꿨던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습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했을 젊은 두 분의 막막함이 새삼 절절해지더군요. 

 

'아아, 그랬겠구나. 

부모님도 못생긴 고아 앤처럼 기댈 곳 하나 없었겠구나. 

어쩌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이 언제 끝날까 불안하기만 했었겠구나.'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나이 드는 일의 미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시간은 어릴 때는 볼 수 없던 것들을 알아차리게 해주니까요.


     “..모든 일이 너무 근사해서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쯤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를 정말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울고 싶어!”  

  - <그린게이블즈의 빨간 머리 앤 1>,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저, 김유경 역, 동서문화사, 2014, 35쪽



Anne of Green Gables, in 1985 TV adaptation. Photograph: Ronald Grant Archive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앤의 마음에 

깊은 우울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어른이 된 후의 일이었습니다.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었을 때, 저는 여러 번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스러웠지요. 

앤은 그 시절 그대로였지만, 어른이 된 저는 더 이상 앤의 친구로만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마릴라의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더라구요. 

특히 입양되기 전날 밤 이야기는 어릴 적 기억 속에 없다는 것이 이상할 만큼 가슴이 아팠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가기 전날, 

앤은 고아원 장식장 유리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이별 인사를 합니다. 

유리창에는 상상이나 수다 같은 건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주근깨투성이 깡마른 여자 고아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두고 가는 것이 슬펐다는 앤의 고백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마릴라가 앤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입양을 결정한 것은 단순히 동정심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릴라는 요란하게 상상하고 수다를 떠는 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유난스러움은 스스로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작은 아이의 안간힘이었다는 것을요. 

마릴라는 그 작은 영혼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외면한다면 앤은 장식장 유리창 속의 아이로 남아 영혼이 메말라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어른다웠던 마릴라와 매튜가 위태로운 영혼을 감싸준 덕분에 앤은 사랑스러운 아이로, 

책임감 있고 건강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이죠. 

그간 살아온 날의 경험으로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 저는 

어린 시절과는 달리 마릴라와 매튜에 대한 존경심으로 꼬마 앤의 성장 이야기를 다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간만이 주는 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앎을 얻기까지 얼마나 실수를 하며 상처받고 상처 주는지 우리들은 다 알죠.... 

시간은 이렇게 동시에 우리를 고단하고 버겁게 하죠. 

세상 두려울 것 없던 아이는 잔뜩 위축된 어른이 되어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확신마저 사라지기도 합니다. 

아이들 중에 ‘어른’이 무엇인지 알아본 후 자라는 아이가 있기는 할까요? 


우리 대부분은 앞자리에서 건네준 시험지를 받아들 듯, 수동적으로 어른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른’에 대해 잘 모르죠. 

잘 모르니 자신감이 없고, 늘 소심합니다. 

잔뜩 기죽은 상태에서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의무감에 짓눌리다 보니 

세상은 늘 무섭고 상처받을 일투성이죠.

잘 모르는 것을 숨기느라 센 척하고 남을 힘들 게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살기는 참 팍팍합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만큼 지혜라는 것을 얻기도 하죠.

그래도 기죽고 소심한 어른들은 그 앎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긍정하거나 위로받지 못합니다. 

뭔가 대단한 권위가 확인해주지 않는 한 

자신의 손에 담긴 지혜를 바닷가에 뒹구는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대하죠. 

때로는 ‘대단한’ 권위나 책에 다가가 지혜를 확인하고 싶지만, 

시간도 부족하고 너무 어렵기도 합니다. 

있다는 것은 알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빛이랄까요...

 

출처: 픽사베이(Michael Treu)

하지만 아이들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은 

슬쩍 다가와 품에 쏙 안기는 아가들처럼 권위에 기죽고 소심한 우리 곁으로 편하게 다가옵니다. 

어른스러운지 아닌지, 잘났는지 못났는지 가리지 않고,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 시험도 보지 않습니다. 

읽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지만, 못 읽었다고 야단맞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책이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어린이 책을 읽으면 또다른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깊이만큼 더 많은 지혜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어른의 동화책 읽기가 어릴 때보다 깊고 넓은 데는 기술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화책 읽기가 '다시 읽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읽기'란 이야기의 가장 큰 쾌락, 즉 처음이라는 신선함과 재미를 포기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새로 읽는 책이라 하더라도 아이들 책에서 충격적인 캐릭터, 상상을 초월한 운명, 조마조마한 사건, 허를 찌르는 반전 등을 기대하는 어른은 많지 않겠죠. 

아우토반을 달리듯 질주하는 흡인력이 없다는 걸 알면서 시작하는 드라이브 같은 것이 바로 어린이책 읽기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다른 것들이 보입니다. 

이야기 주위에 숨겨져 있던 풍경에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이 스며드는 것이죠. 

여유 속에서 지혜가 고이는 셈입니다.


또한 그 느릿한 읽기 속에서 오랜만에 차분해지는 경험도 하죠. 

놀랍거나 무섭거나 어려울까봐 긴장하지 않는 책읽기 속에서 우리는 아주 오래된 숨쉬기를 기억해냅니다. 

숨 가쁘게 살아간다는 말이 단지 수식어가 아닌 어른의 삶. 

너무 바빠서 혹은 일이 잘 되지 않아서 우리는 항상 가쁘고 거친 숨을 쉽니다. 

어쩌다 휴식 시간이 되어도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리지 않죠. 

영화를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고, 책 한 줄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많고요. 

이렇게 과열되어 있을 때, 

인생은 위태롭고 정신은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여 터져버릴 것 같을 때 휴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휴식하는 법조차 잊어버렸다고 느끼죠.

그럴 때, 가만히 아이들 책을 펼치면 좋습니다. 

특히 권하고 싶은 것은 그림책. 

<보리와 임금님> 삽화, 국민서관, 1975

그림책은 말 그대로 그림이 주인이 되는 책입니다. 

글이 매우 적거나 없는 경우도 많아요. 

아이들처럼 어른도 글자가 적으면 부담감을 덜 느끼거든요. 

그림책 작가들은 회화의 모든 기법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리드미컬한 선, 자유로운 형태, 다양한 질감이 묻어나는 풍부한 색의 그림들이 쾌락과 위안을 주죠. 

하지만 전시회에 걸린 그림과 그림책의 그림은 다릅니다. 

글이 있든 없든 그림책은 마지막까지 안 보고는 못 배기게끔 계속해서 독자에게 말을 걸거든요. 

그 묘미를 모르는 어떤 부모들은 한번 보는데 5분도 걸리지 않는 그림책을 사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런 어른들이라도 자연스럽게 숨 쉬는 아이들이 고른 그림책은 사줄 수밖에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10번 넘게 대출하다 보면, 

긴 대기줄에 이름을 올려놓다 보면, 

찢어진 페이지를 붙이다보면 결국엔 책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많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읽어주다가 그림책에 빠진다고 합니다. 

아가들 덕분에 숨 쉬기를 다시 배운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을까요?

아무튼 그 어른들은 압니다. 

20페이지도 안 되는 그림책이 100번을 봐도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을. 

가만히 그림의 세계에 들어가 감동과 격려를 받다 보면 어느 새 숨이 편안해진다는 것을요. 

상냥하게 말을 걸어준 그림책 덕분에 아늑하고 안전한 동굴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으며 어느새 치유받는다는 것도요.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마법사의 사계절> , 이장미 그림

저는 우연한 기회에 그림이 말을 거는 방식을 엿본 적이 있습니다. 

음악을 소재로 동화를 썼을 때의 일이었는데요, 

기획자가 책에 그림을 넣자고 했을 때, 저는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그림이 들어갈 자리를 생각하며 쓴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은 그저 장식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던 탓입니다. 

하지만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저는 그림만의 이야기 방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그림 속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원래 주인공은 엉뚱하고 유쾌한 남자아이였습니다. 

조손 가정이지만 그늘이라곤 없는 아이였고 일어나는 일들도 대부분 유쾌했지요.  

하지만 그림 작가는 그 아이의 어쩔 수 없는 결핍을 발견했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의 허술한 입성을 과하지 않게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이 한번이라도 더 그 아이를 보게 만들었죠. 이 경험을 통해 저는 그림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숨겨놓는지, 

어떤 방식으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깊은 숨을 쉬던 시절로부터 위로받는 느낌이 듭니다. 

순수하고, 따뜻하며, 모든 사람의 귀가 크게 열려 있던 시절의 위로를....... 


어릴 적 막연히 생각했던 어른의 모습과 실제 어른이 되어 알게 된 어른의 모습을 비교해봅니다. 

선입견 속의 어른은 흔들리는 일 없는 딱딱한 생명체였지만, 저는 한 번도 그런 어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제가 본 어른들 대부분은 흔들리느라 상처투성이였고, 

그러면서도 매년 꽃을 피우는 천년고목처럼 성장하기를 바라는 존재였습니다. 

어렸을 때보다 많은 지혜를 얻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시간도 자신감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림책은 그런 어른들에게도 쉴 곳이 되어줍니다.

작은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주지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편견과 소심함의 더께를 닦아내면 진주 같은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발효된 시간의 힘 덕분에 동화나 그림책은 우리에게 빛이 되곤 합니다. 

사랑과 격려가 필요한 어른들에게 어린이 책은 가장 순수한 위안과 자신감을 채워줍니다. 

우리가 얻은 지혜가 바르다고, 바보 같았다고 자책한 그 일이 실은 정직한 선택이었다고, 

한동안 듣지 못한 칭찬을 해줍니다. 

칭찬이 필요 없는 아이가 없듯이 칭찬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는 어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어른의 가슴 속에는 잃어버린 아이가 하나쯤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이라는 가면 안에 숨어야 하는 외로운 아이들은 

빨강 머리 앤처럼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되기를 은밀하게 기대하고 있지요.... 

순수함을 안아주고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지혜로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양부모를 말이에요.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그런 ‘나의’ 아이들의 양부모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혼자 울고 있는 그 아이에게 좋은 책을 읽어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정말 좋은 동화책과 그림책이 

내 안에 살고 있는 ‘나의 아이’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을 보듬어 좋은 어른으로 성장시켜 줄 것입니다.

   

Barrett and MacKay / Getty Images





                                         * 이 글은 <wee> 매거진에 실린 글을 수정하여 다시 올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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